[우리말 산책]크레파스에서 ‘살색’이 없어졌다
오는 7일이 입추(立秋)다. 말 그대로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때다. 하지만 입추를 지나서 말복(末伏)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무렵엔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뜨거운 햇볕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만, 그 기운이 곡식을 살찌운다. 곡식이 한창 여무는 이 무렵 제철 과일 중 하나가 살구다. 살구는 ‘신라의 경주에 살구꽃이 많이 피었다’는 옛 기록이 있을 정도로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린 세월이 깊다.
오랜 세월만큼 쓰임도 다양하다. 살구의 씨인 행인(杏仁)은 오래전부터 한방에서 기침과 천식을 다스리고 변비를 개선하는 약재로 쓰였다. 살구가 품고 있는 성분들은 현대 의학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도 살구를 식용보다는 약용으로 더 널리 재배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또 살구의 과육은 부드럽지만 나무의 재질은 아주 단단하다. 옛날에 다듬잇방망이를 만들던 재료 중 하나가 살구나무이고, 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은 그 어떤 목탁보다도 소리가 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살구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속설도 있다. 개를 살구나무에 매어 두면 개가 죽는다거나 개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는 살구 또는 살구씨가 특효라는 설이 그것이다. 이런 얘기 때문에 과거 개고기를 팔던 음식점들은 계산대에 살구씨를 말려서 얇게 썬 것을 비치해 놓곤 했다. 하지만 이는 살구가 한자어 殺狗(죽일 살, 개 구)에서 온 것으로 잘못 유추한 데서 비롯된 낭설이다. 살구는 순우리말이며, 옛 표기는 ‘살고’다.
한편 예전엔 “연한 노란빛을 띤 분홍색”을 ‘살색’으로 표현하곤 했다. ‘살색 스타킹’이나 ‘살색 크레파스’ 등이 대표적 예다. 하지만 피부색은 인종 또는 개인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한 노란빛을 띤 분홍색”을 살색으로 표현할 경우 누군가에겐 차별적 언어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크레파스의 살색이나 스타킹의 살색은 ‘살구색’으로 쓰도록 표준어가 바뀌었다. 다만 “햇볕에 그을려 살색이 검게 됐다”처럼 저마다의 살갗 색깔을 뜻하는 말로는 살색을 쓸 수 있다.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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