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수산칼럼] 희망봉, 최악의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
지난 해 11월 홍해에서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가 민간 선박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안전 통항에 심각한 제약이 발생한 후 사태가 6개월을 넘어 장기화되고 있다. 해운 선사들은 홍해 항로를 피해 유럽으로 가는 안전한 대체 운송 경로를 고민하지만,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 우회를 우선 선택한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같은 선구적인 탐험가들이 1497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희망봉은 4세기 이상 세계 해운과 상업의 중요한 교차점이었다.
1869년 아시아와 유럽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희망봉의 위상은 크게 하락했는데 이 인공 수로는 수에즈 지협을 가로질러 유럽과 아시아 간 이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희망봉을 우회하던 선박은 항해 거리가 7000㎞ 짧아지면서 운송 시간이 10~15일 단축되고 연료비도 40%까지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다의 고속도로인 수에즈 운하는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는데 더 빈번한 항해와 무역량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이동 시간과 비용이 줄어들어 상품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실어 나를 수 있었고, 이는 소비자에게는 낮은 가격을, 기업에게는 높은 수익을 주었다. 전 세계 무역의 15%와 컨테이너 운송의 30%를 처리하는 수에즈 운하가 국제 해운의 선호 경로로 자리잡으면서 희망봉은 자연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홍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단일 항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취약성을 상기시키자 선박과 화물, 선원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희망봉이 해상 운송의 핵심 경로로 다시 부상 중이다. 길어진 운항 시간만큼 연료비와 운임이 상승하고 험난한 지형으로 해상 사고도 잦아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불확실성과 변동성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적 대안이다. 지난 6개월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선박은 최대 70% 가량 줄었고 희망봉을 우회하는 선박 수는 배 이상 급증했다.
이러한 현상은 주변 국가들에게 다양한 명암을 던지고 있는데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큰 타격은 이집트에서 발생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에 부과하는 통과 수수료는 이집트 GDP의 2%를 차지하는 중요한 외화 수입원인데 통행량 감소로 운하 수익은 지난해 보다 64%나 줄었다. 홍해 사태 장기화는 더 많은 국고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홍해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의 감소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여러 항만이 새로운 물류 서비스와 급유를 위한 허브로 변모하도록 하고 있다.
더반, 포트 엘리자베스, 케이프타운 등 남아프리카공화국 항만들은 가장 두드러진 선박 유입을 경험하고 있고 마다가스카르의 토아 마시나, 모리셔스의 포트 루이스, 케냐의 몸바사,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등 동아프리카의 주요 항만도 눈에 띄게 기항 선박 수가 늘고 있다. 또한, 지중해는 사실상 해상 종점이 되어 지브롤터 해협 인근의 항만들이 환적 허브로 물동량이 급증하는 추세다. 희망봉을 일주한 후 많은 선박은 스페인 알제시라스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모로코 탕헤르와 같은 지중해 서쪽의 항만들에 컨테이너를 내려놓은 후 단거리 피더 서비스를 통해 중동부 지중해 항만으로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 대형 선박들은 지중해 안쪽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극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미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대규모 환적 항만인 모로코 탕헤르는 올해 상반기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 서부 지중해 항만들도 20%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반면, 수에즈 운하와 가까운 중동부 지중해 항만들은 기항 선박 축소로 물동량 감소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탈리아의 대표 항만인 지오이아 타우로와 피레우스는 각각 18% 및 31%나 물동량이 줄었다. 이번 홍해 사태가 해운 및 글로벌 공급망에 미치는 전체 영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선박의 희망봉 우회는 이미 다양한 파급 효과를 낳고 있다. 글로벌 운송 네트워크의 경로 유연성 측면에서 희망봉은 빛바랜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역동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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