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윤이나의 예고된 우승과 KLPGA투어가 갈 길
[골프한국] 역대 프로골퍼 중 타미 볼트(Thomas Henry Bolt, 1916-2008)만큼 불같은 성미의 골퍼도 찾기 힘들 것이다. 1958년 US오픈에서 우승도 한 그는 샷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채를 내던지거나 꺾어버리고 그것도 부족해 숲으로 들어가 가시덤불 위에서 뒹굴기도 했다. 한번은 토너먼트 마지막 홀에서 그린까지 120야드를 남겨놓고 캐디가 3번 아이언을 꺼내주었다.
"이게 뭐야. 이걸로 치면 200야드 이상 날아가는데?"
볼트의 말에 캐디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알지요. 그렇지만 이제 남은 채는 이것밖에 없어요."
볼트가 나머지 채를 모두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천둥 벼락(thunderbolt)'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던 그는 치솟는 화를 달래는 평정심을 얻는 법을 터득하면서 PGA투어에서 15승을 거두었다.
분노가 골퍼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깨달은 볼트는 만년에 "화를 내면 낼수록 집중력과 자제력은 내려가고 대신 스코어와 분노는 더욱 치솟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2000년 5월 22일 미국 오하이오 주 비버 크리크의 노스컨트리클럽에서 막을 내린 퍼스타LPGA 클래식 4라운드서 호주의 캐리 웹은 순간의 흥분으로 거의 손에 거머쥔 승리를 놓쳤다. 웹은 파5의 8번 홀(489야드)에서 세컨드 샷이 그린 주변 벙커에 빠져 3번째 샷으로 온 그린을 시도했으나 벙커 탈출에 실패했다. 웹은 흥분한 나머지 골프채로 모래를 내리쳤다.
'볼이 벙커 내에 있을 때 클럽을 지면에 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다. 이 때문에 2벌타를 받은 웹은 이 홀에서 트리플 보기를 기록, 순식간에 한 타 차 단독선두에서 공동 5위로 내려앉았다. 이후 웹은 선전했지만 아니카 소렌스탐에게 한 타 뒤져 공동 2위에 만족해야 했다. 웹은 경기를 마친 뒤 "너무 화가 나 볼이 벙커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고 후회하면서 "TV에 중계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2022년 6월 한국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일어난 오구(誤球) 플레이 늑장 신고로 3년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뒤 출전 정지기간이 1년6개월로 단축돼 올 시즌 4월부터 KLPGA투어에 복귀한 윤이나(21)의 두 번째 우승은 사실상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KLPGA투어에 복귀하자마자 장타력을 겸비한 경기력으로 팬덤이 형성된 그는 단독 2위 한 번, 공동 2위 두 번, 공동 3위 한 번 등의 전적으로 우승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4일 제주시 블랙스톤 제주골프장에서 막을 내린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윤이나는 최종 합계 14언더파 274타로 공동 2위 그룹(강채연, 방신실, 박혜준)에 2타 차로 앞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복귀 후 첫승에 이르기까지 윤이나는 희망과 함께 고통을 맛봐야 했다. 복귀 시기를 두고도 선수와 골프 팬들 사이에 부정적 시선이 없지 않았다. 특히 선수들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팬덤이 형성될 정도의 높은 인기는 동료 선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와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가 우승했을 때 물세례 같은 축하 세리머니가 나올지 의문시 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선수들끼리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도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데 특정 선수와 한랭전선이 형성된 가운데서 개개인의 선전(善戰)은 기대할 수 없다. 한 마리의 메기가 작은 연못에 긴장감을 불러와 연못에 생동력을 준다는 '메기 효과'이론이 있긴 하지만 철저한 평정심을 요구하는 골프에서 이런 종류의 적대감은 선수 모두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온갖 조건과 상황과의 조화를 꾀하면서 잔잔한 호수 같은 평정심이 요구되는 골프에서 동료선수에 대해 적대감에 휩싸인다는 것은 KLPGA투어라는 큰 연못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역효과를 부를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골프에서 자신의 일이 아닌 다른 선수에 대한 적대감으로 영향을 받는다면 골프의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행히 윤이나가 우승하자 많은 동료들이 물세례 세리머니를 펼쳤고 윤이나도 포옹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었다.
윤이나의 우승이 KLPGA투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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