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이데올로기 거부…좌·우익 공격받은 ‘탈 이념주의’
- 마르크스의 ‘자본론’ 두루 섭렵
- 소련공산당 잔혹한 폭력에 환멸
- ‘지리산’ ‘남로당’ 등에 흔적 뚜렷
- 해방정국 친구들 희생에 좌절감
- 해인사 출가, 총선 출마까지 실행
- ‘이데올로기 연좌’ 끝내 못 풀어
나림 이병주는 공산주의를 깊이 연구했다. 해방정국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절실했다. 당시 교사 60명 중 55명이 남로당원이거나 동조자였고, 학생도 상급반의 경우 33명 중 32명이 좌익 단체인 학생동맹 맹원이었다. 이들과 대화하고 갈등하고 대결하며 나림은 이론투쟁에 대비해야 했다. 마침 담당 과목이 철학이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안티 코뮤니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정독했고, 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생래적으로 마르크시즘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연구할수록 마르크시스트의 철학적 태도마저 수용할 수 없었다. 나림의 공산주의 해설과 소련 공산당 한국 공산당 탐구는 ‘관부연락선’에서 원형을 보이고, ‘지리산’을 거쳐 ‘남로당’에서 활사(活寫)가 선명하다.
나림은 도스토옙스키의 가족을 혹독하게 박해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소련공산당이 첫인상부터 고약했다. 거기에 더해 톨스토이 전기를 쓴 보리스 필리냐크를 단지 트로츠키파라는 이유만으로 극형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런 정권을 만든 사상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1920년대 태생인 나림 세대는 스페인 내전의 인민전선에 흥분하던 세대다. 인민전선파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에게 격하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스탈린이 인민전선의 아나키스트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대목에서 지식인들은 환멸에 빠졌고, 나림도 생래적으로 안티 코뮤니즘 정서였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으나 마르크시스트의 철학적 태도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다른 철학을 비판할 때는 온갖 의식을 다 깨워놓고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조언하면서 정작 마르크스 철학만은 비판 없이 겸손하게 읽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위선적이고 교조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좌익 교사의 사상적 지주인 M은 나림과 때로 대립하고 때로 대화하며 “마르크시즘에 처음부터 동경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선악과 호오를 따질 필요 없이 기존 가치체계를 확 바꾸려면 이 사상밖에 없다는 확신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두 사람의 대화 끝이다. “피차가 성실하기만 하면 어느 때 어떤 지점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M의 믿음에 나림은 “나의 목적은 윤리에 있고, M의 목적은 혁명에 있으니 합류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한다. M은 소련도 변하겠지만 중국에 더 큰 희망이 있다고 낙관한다. M은 ‘남로당’과 ‘여사록(如斯錄)’에 실명 민병준으로 등장한다. 진해 해사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군함 1척을 북한에 보내고 두 번째 작업을 하다가 적발돼 동료 교수 7명과 처형된다. 진주농고 제자도 여럿 죽거나 상했다.
▮이데올로기를 불신한 이유
나림은 기본적으로 탈 이념이다. 이데올로기 자체를 싫어한다. 백지에서 출발하지 못하는 한 어떤 이데올로기든 하나의 선을 위해 백의 악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회(體會)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고 가혹하게 시대를 겪은 나림은 세 가지 이유로 이데올로기를 불신한다. 첫째, 이데올로기의 비역사성이다. 인간의 역사는 단순명료하지도 않고 깔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진흙탕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깔끔하게 단순화하려 한다. 역사는 시비선악이 뒤섞여 있다.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권모술수가 진실을 압도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걸 한쪽으로만 해석하고 일도양단으로 판단해버리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독선에 빠지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단순명료성에서 나오지만, 참으로 비역사적이다. 둘째,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이다. 이데올로기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싹둑싹둑 가위로 잘라 정돈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그 가위질이 정돈이 아니라 오히려 낭패를 만드는 게 현실이다. 인생이란 힘들더라도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풀어가는 데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다. 사실 사람을 이데올로기 틀에 담으려는 의도와 시도 자체가 비인간적이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뺐기 때문이다.
셋째, 비현실성이다. 인간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하고 역사는 예측 불가하다. 인간의 애씀이 결국 더 깊은 진흙 수렁에 빠지게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비현실적이다. 역사를 이데올로기의 수족으로 만들어 정치화하면 그 역사는 실제 현실이 아니다.
고은은 ‘만인보’에서 “소설가 이병주는 이데올로기를 멜로드라마로 그리는 사람, 이데올로기를 추억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이데올로기를 낭만적으로만 접근하고 나이브하게 터치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림의 이데올로기 이해와 체득은 고은이 그렇게 냉소적인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수준도 수준이지만 나림은 고은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인간’이 희생되다
‘관부연락선’엔 나림의 친구 H가 중국 공산당과 결탁해 반전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만주에 갔다는 죄명으로 형을 살다가 위장 전향한 사연이 있다. 자유는 얻었으나 여전히 방향을 못 잡고 방황하던 차에 고바야시 히데오의 강의를 듣는데, 고바야시 교수는 사관(史觀)을 지도에 비유해 유물사관도 지도의 하나라고 했다. 지도는 아무리 정교해도 실제와는 다르다. 미국의 지도를 보고 미국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공산주의자의 문제는 하나의 지도에 불과한 것을 절대 최고 지도로 모시는 것에 더해 그 지도가 역사 자체인 양 여기며 남에게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 강의를 듣고 H는 그렇게 매력적이던 유물사관이 낡아빠진 의상을 두른 허수아비처럼 보이게 되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사상엔 지조가 있다. 굳이 설명해야만 이해되는 인격은 인격이 아니듯 구구하게 변명해야만 이해되는 사상은 지조의 사상이 아니다. 하지만 난세엔 덜된 지식인들이 날뛴다. 얼치기들의 경박은 악덕 이상으로 나쁘다. 이기심을 감춘 허장성세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림은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이 한 일련의 공작이 모두 그런 맥락이라고 단언한다. 그 만화 같은 놀음에 빛나는 천재의 친구들이 희생된 사실을 나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거듭된 전쟁으로 인류는 기왕에 아름답고 준수한 인물을 많이 잃었다. 거기에 더해 증오를 부추기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기막힌 인물들이 스러진 걸 나림은 용납하지 못했다.
나림은 6.25 전란 중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순전히 좌익과 우익을 우정으로 넘은 친구들의 도움이었다. 운명 또는 섭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거듭됐다. 그럼에도 친구 이광학의 죽음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림은 해인사로 출가했다. 적막하고 슬펐으며, 세상이 원망스럽고 자신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다 느꼈다. 언어도(言語道)가 단(斷)하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하는 상황을 절감했고, 허망했다.
▮좌우 양쪽에서 공격받다
나림은 고봉 스님을 만난다. 고봉은 불학과 유학에 두루 통달한 자유자재의 선지식이었다. 선종을 중흥한 경허에게 대자유를 배우고, 만공의 법맥을 이었다. 주색을 마다하지 않아 주(酒)고봉으로 불렸고, 화엄경을 보며 좌탈(坐脫)했다. 고봉은 나림의 출가를 만류하며 1년을 지내보자고 했다. 해인사 시절 나림은 빨치산에게 납치될 뻔했다. 해방정국에선 우익 반동 교사라고 비난받더니 6·25를 거치면서 좌익 부역자로 경찰 조사에 더해 미군 CIC(방첩대) 조사까지 받았다.
나림은 좌우익 양쪽에서 다 공격받았다. 억울함을 풀고자 3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극심한 부정선거와 빨치산 출신이라는 선동에 3위로 낙선했다. 1위 2위 후보와의 표 차이는 거의 없었다.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연좌제만큼은 해소하고 싶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5·16 후 나림은 용공 혐의로 체포되어 2년 7개월 징역을 산다. 사람을 살리는 사상, 사람의 체취가 물씬 나는 사상을 염원했던 휴머니스트 나림에게 이 어이없는 옥살이는 가슴의 고슴도치로 남았다. 사람은 통분을 안고 살 수는 없다. 해원(解冤) 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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