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자취 감췄다가…다시 ‘K-찜질’로 외국인 공략
- 통일신라시대부터 ‘증기욕’ 발달
- 이방원도 황토로 피부병 치료해
- 90년대 괴정서 ‘찜질방’ 첫 등장
- IMF 시절 저렴한 여가공간 각광
- 좀도둑·가출 청소년·도박판까지
- 전국적 유행에 부작용 곳곳 속출
- 팬데믹 거치며 전국 252곳 폐업
- 외국인 관광객 사이서 재전성기
- 달걀·식혜 먹으며 한국문화 체험
고온의 무거운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황토방’이라 쓰인 간판 아래 온도계가 61도를 가리킨다. 바닥에 드러눕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어 보인다. 먼저 자리 한 편을 차지한 중년들이 웬 호들갑이냐는 듯 슬쩍 눈길을 던진다. 이윽고 “어, 시원하다”며 나지막한 탄성을 내지른다. 입에서 나온 말과 달리,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내기에 바쁘다. 머리칼과 찜질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축축하다.
황토방 바깥 휴게실에선 꼬마 아이들의 간식 만찬이 벌어진다. 구릿빛 자태를 뽐내는 맥반석 달걀을 머리에 톡 두드려 깐 뒤 입에 넣더니, 뒤이어 밥알이 둥둥 떠오른 뽀얀 식혜를 한 입 들이켠다. 머리에는 저마다 하얀 ‘양머리 수건’을 둘렀다.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유행시켰다나 뭐라나.
찜질방 문화는 한국 문화의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30여 년 만의 일이다. 웬종일 온돌바닥에 널브러져 쉴 수 있다는 점을 매력으로 전국에 번졌다. 개업 25년 차 찜질방 ‘영도해수랜드’ 임승철(65) 대표는 “2000년대 초중반 찜질방은 인기가 정말 많았다. 하루 3000명 이상이 찾았던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찜질방의 인기는 어느덧 과거형이 됐다. 부산만 해도 2019년 57곳에서 올해 47곳으로 열 곳 줄었다. 그마저도 찜질방 간판만 단 목욕업소가 적지 않다. 그 많던 찜질방, 어디로 갔을까.
▮찜질방 전성시대
현대식 찜질방은 1993년 무렵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해당 찜질방을 시공한 장인수(65) 삼주ENG디자인그룹 대표는 “태종 이방원이 황토로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사실에 착안해 찜질방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며 “1993년 한 목욕탕의 의뢰를 받아 시공한 게 최초의 찜질방이었다”고 설명했다. 초기 찜질방은 5, 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서너 개의 온돌방과 탈의실을 갖춘 형태였다. ‘사문석’으로 이뤄진 방의 온도는 지금과 달리 38~42도의 ‘따뜻한’ 수준이었다.
찜질방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장 대표가 시공한 찜질방만 전국 수천 곳에 이른다고 한다. ‘찜질방이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이듬해부터는 대형 프랜차이즈 찜질방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고온의 원적외선이 몸을 치유한다는 식의 마케팅 포인트가 더해지면서 손님을 끌어모았다. 대형 프랜차이즈 원조 격인 ‘심봤다힘돌찜질방’은 1994년 부산 동래구 사직동에 1호점을 낸 지 불과 1년 만에 전국 500여 곳으로 불어날 정도였다. 온도가 70도를 넘는 찜질방도 이 무렵부터 등장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찜질방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특히 IMF 외환 위기 이후 온 가족이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여가공간으로 사랑받았다. 찜질방은 한국인 특유의 ‘24시간 문화’에 완벽히 부합하는 장소였다. 찜질·목욕은 물론 식당·PC방·영화관·노래방까지 즐긴 뒤 숙박까지 해결되는, 실내 여가문화의 총체였다. 직장인 여행객 연인 할 것 없이 남녀노소가 찜질방을 찾았다. 이곳에서 싼값에 숙식을 모두 해결하는 장기 투숙객도 적지 않았다. 인근의 영세한 대중목욕탕 주인들은 찜질방의 세력 확장에 손님을 빼앗길까 마음 졸여야 했다.
▮찜질의 민족
한국인의 찜질 사랑은 새로운 유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옛 문화의 재발견에 가까웠다. 한국 찜질 문화의 기원은 1000년을 거슬러 올라 통일신라시대부터다. 달궈진 돌에 물을 끼얹어 생긴 증기에 몸을 씻는 ‘증기욕’이 발달했었다고 전해진다. 북유럽 국가 핀란드의 사우나와 비슷하다. 조선시대엔 현대와 유사한 형태의 ‘한증소(한증막)’가 등장했다. 황토·돌 등으로 쌓은 둥근 돔 모양의 커다란 가마로, 바닥에 몸을 뉠 수 있도록 잎을 깔았다. 주로 소나무 등의 목재로 불에 때 가마를 뜨겁게 데운 뒤 안으로 들어가 몸을 지졌다. 현대와 같은 ‘여가문화의 총체’라기보단 질병을 치료하는 요양시설 역할이었다. 조선왕조실록 1422년(세종4년) 기록에는 세종이 ‘한증소에 환자가 오면 그의 증세를 진단해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은 땀을 빼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의약서 ‘향약집성방’에는 땀 내는 치료법인 ‘증법’이 상세히 기록됐다. 먼저 땔나무를 태워 불을 쓸어버린 뒤 약간의 물을 땅에 뿌려 잠사·복숭아 잎·측백나무 잎·쌀겨·보릿짚 등을 땅 위에 2~3촌 두께로 깐다. 그 뒤 이불을 덮고 너무 뜨겁지 않도록 한 상태로 땀을 낸다. 여러 임금도 병을 다스리고자 찜질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인혜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찜질방은 1990년대에 1960년대 이전의 재래식 온돌을 현대화한 베이비붐 세대의 ‘레트로’였다”며 “여기에 노래방·비디오방과 같은 ‘방’ 문화가 가세하며 인기를 끌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우여곡절의 시간
막 찜질방이 등장할 무렵엔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가 대두됐다. 신생업이라 관련 법이 마련되지 못한 영향이었다. 찜질방만 노리는 전문털이범이 등장하는가 하면, 판돈을 걸고 화투 내기를 벌이는 이용객들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위생 문제는 물론이요, 가출 청소년의 투숙 장소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5년 시설 및 운영기준이 마련되고서야 이런 모습이 점차 자취를 감췄다.
2010년대 이후로 찜질방은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은 있는 시설로 자리 잡았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업체도 속출했다. 2000년대 전국에서 폐업한 ‘찜질시설 서비스 영업’ 업체는 157곳에 그쳤으나, 2010년대에는 4배 이상인 690곳이 문을 닫았다. 부산의 폐업 건수도 ▷2000년대 7곳에서 ▷2010년대 21곳으로 늘었다.
찜질방 전성시대를 끝내버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코로나19의 확산이었다. 한 공간에 널브러질 수 있다는 매력 포인트가 팬데믹 시대에 들어서는 ‘감염의 온상’ 신세가 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새에만 전국 252곳의 찜질방이 문을 닫았다. 임 대표는 “팬데믹 시기 인근 찜질방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며 “우리도 이용객 80% 정도가 줄었다. 지금은 코로나 직전의 60% 정도 회복한 상태”라고 토로했다.
▮외국인 관심에 훈풍 불까
코로나19 사태는 그 끝을 맺었지만, 찜질방 업계의 신음은 여전하다. 운영의 핵심인 난방비가 비싸진 게 가장 큰 문제다. 업종 특성상 영업을 개시하려면 손님이 많든 적든 반드시 찜질 시설을 데워놔야 한다. 이용객 발길이 거의 끊긴 상황 속 급등한 연료비를 감내하면서까지 하루 종일 찜질방 불을 지펴 둘 업주는 많지 않다.
팬데믹이 남긴 상흔은 깊었지만 아직 좌절하기엔 이르다. ‘찐’ 로컬 감성을 원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필두로 찜질방을 향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서 #jjimjilbang을 검색하면 1만6000여 개의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나 틱톡 등에서도 한국의 찜질방을 소개하는 영상 콘텐츠가 즐비하다. 24시간 찜질방을 운영하는 수영구 광안동 ‘호텔아쿠아펠리스’는 최근 외국인 고객이 크게 늘었다. 이곳 관계자는 “숙박비가 부담스러운 관광객의 수요가 많다. 찜질방 이용객의 40% 이상이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찜질시설인 해운대구 센텀시티 ‘스파랜드’ 관계자 역시 “팬데믹 이후로 이곳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며 “특히 양머리·식혜·계란 등 찜질방 문화를 즐기는 방법에 관한 문의가 많아 이를 소개하는 시설물을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동서대 권장욱(관광·컨벤션경영학과) 교수는 “찜질방은 한국적 공간에서 한국적 음료를 마시고, 한국적 놀이를 즐기는 곳”이라며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는 좀더 한국적인 매력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찜질방은 관광자원으로서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분석했다.
영상= 김태훈 김진철 김채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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