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경사 딱 좋아 어르신 보약숲…인근 달방 끊어 요양도
- 입구서 수원지 한바퀴 2800m
- 추자골 옆 체력단련장 인기만점
- 오전 10시~오후 4시 노인 북적
- 건강 지키는 도심 속 지상 낙원
국제신문 찾아가는 77번 버스 이번 행선지는 부산의 ‘허파’ 성지곡이 있는 부산진구 초읍동이다. 백양산 기슭에 있는 성지곡은 상수원 기능은 상실했으나, 주변의 각종 수목이 울창해 도심 속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인기가 많다. 특히 성지곡은 몸이 ‘편찮은’ 노인에게는 힐링의 장소다. 사계절 수목을 따라 조성된 코스를 따라 걸으며 병을 다스린다. 매일 성지곡을 오르기 위해 아예 이곳으로 집을 옮긴 이도 심심치 않게 있다.
▮성지곡 날다람쥐
“시원하지?”
도심 속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기자에게 김모(85) 할아버지가 물었다. 7월 말 푹푹 찌던 더위는 성지곡 입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삼복더위가 절정이었지만, 울창한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그늘, 옛 수원지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덕에 성지곡은 말 그대로 거대한 피서지였다. 김 할아버지는 성지곡 수원지를 하루에 두 번씩 매일 돈다. 15년 전부터 생긴 유일한 취미다. “오전 10시, 오후 4시쯤 나 같은 노인네가 가장 많은 시간대야. 나도 아침 식사 후 한 바퀴, 저녁 식사 전 한 바퀴 돌아. 그때는 벤치에 빈자리를 찾기도 힘들다고.”
김 할아버지는 별다른 짐 없이 오른손에 오래된 부채 하나를 들고 앞섰다. 나무 덱 좌우로 높은 키의 삼나무가 빽빽하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평화롭고, 백목련 졸참나무 등 나무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칠 만하면 보이는 나태주의 시구를 마음속으로 음미하는 것도 즐겁다. 여유롭게 앞서가던 김 할아버지가 성지교 위에서 수면 위에 떠오른 거대한 잉어를 구경한다. 건장한 남자 허벅지보다 훨씬 큰 잉어들이 큰 입을 뻐끔거린다. 기자가 성지교에 뒤늦게 다다르자 김 할아버지는 다시 걷는다. 정말, 날다람쥐가 따로 없다.
추자골에 이르자 거대한 체력 단련장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는 체력 단련장 기구 유지·보수에 도움을 준 찬조자의 명단이 붙어있다. 과거 초소로 쓰였을 법한 관리동에서는 흥겨운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왔다. 할머니들은 허리나 어깨를 돌리며 관절을 풀고, 할아버지들은 무게를 주로 들며 기합을 내지른다. 나이를 먹은 듯 오래된 60여 개의 헬스 기구는 곳곳이 녹슬었지만, 꼭 몸에 맞는다.
성지곡 입구에서 수원지를 돌아 나오는 코스는 2800m다. 김 씨 할아버지는 평소 이 코스를 35~40분 만에 주파한다. 그러나 이날은 추자골에서 체력 단련 시간을 빼고 꼬박 1시간이 걸렸다. 김 할아버지는 “평소에 자주와 운동 좀 하라고”라며 핀잔을 줬다. 기자는 체력때문이 아니라 취재하느라 늦은 것이다.
▮나를 살게 하는 숲
노인에게 건강만 한 관심사가 있을까. 이날도 여생을 조금이라도 활기차게 보내고 싶은 노인으로 성지곡이 가득하다. 당뇨를 앓고 있는 강모(76) 할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다. 강 할아버지는 성지곡 덕분에 병석에서 일어나 제2의 삶을 사는 중이다.
강 할아버지는 40대에 당뇨 판정을 받았다. 50대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눈도 잘 안 보인다. 이후 C형 간염까지 도졌다. 여기저기 아프고 병들어 누워 있던 강 할아버지는 6년 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라고 마음먹고 성지곡을 처음 올랐다.
강 할아버지는 “그때는 정말 산송장과 다름없었지. 운동을 하려고 해도 몸이 안 따라주지, 만나는 사람은 없지 그냥 약만 먹고 누워서 우울하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회상했다. 그는 “용기 내서 성지곡 딱 한 번 올랐는데 나한테 딱 맞더라고. 거리 적당하지, 경사 적당하지, 자연 속에서 치유 받는 느낌이 좋아서 매일 올라. 요즘은 정말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라며 웃었다.
강 할아버지는 “이제는 매일 세 바퀴를 돌아. 집에서 점심 먹고 와서 운동하면 딱 오후 4시야. 그럼 귀가해서 씻고 밥 먹고 자는 거지.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운동을 못하는데, 그러면 요즘 잠까지 설쳐. 성지곡이 나한테는 보약이야, 보약”이라고 덧붙였다.
최모(77) 할아버지도 40대 저혈당으로 쓰러진 후 30년 넘게 성지곡을 오른다. 매일 아내와 함께 추자골 체력 단련장에서 운동한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둔다.
최 할아버지는 “사업을 해서 젊었을 때 접대하느라 술을 많이 먹었어. 그러다 쓰러졌는데 여기 안 오고 누워만 있었다면 아마 벌써 죽었을 거야”라고 회상했다. 최 할아버지가 처음 성지곡을 오를 때는 추자골까지 10번은 쉬어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서너 번만 쉰다. 나이는 서른 살을 더 먹었는데 체력은 오히려 더 좋아진 셈이다. 최 할아버지는 “성지곡 덕분에 아직 당뇨 합병증도 안 왔어. 바람도 좋고, 물도 좋고, 이 더위에도 시원하니 지상 낙원이야”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귀향보다 성지곡
젊은 시절 서모(72) 할아버지는 귀향을 꿈꿨다. 번잡한 도심을 떠나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아내를 설득하고, 주말에는 땅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 서 할아버지는 폐암을 선고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자주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병원이 멀다는 점이 시골로 이사하려던 그의 발목을 잡았다. 서 할아버지가 선택한 대안은 초읍이었다. 5년 전 수술 후 성지곡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아예 집을 부산진구 가야동에서 성지곡이 있는 초읍으로 옮겨버렸다. 서 할아버지는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사해 매일 운동한 덕에 수술 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후가 좋다. 시골에 못 내려간 건 아쉽지만 성지곡도 그에 못지않은 자연환경에 병원까지 가까워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 씨 할아버지처럼 강 씨 할아버지와 최 씨 할아버지도 초읍동 주민이다. 수십 년 전 당뇨가 와 건강 관리가 필요한 순간 초읍으로 이사와 오늘에 이르렀다.
초읍 회전교차로 인근 모텔에 달방을 끊어놓고 요양하는 경우도 있다. 취재진이 성지곡 입구 쪽 번화가에 있는 모텔을 돌아보니 실제로 ‘달방’을 모집하는 숙박업소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A 모텔 관계자는 “70대 노인 부부가 5일 전에 장기숙박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서 요양하러 왔는데, 낮에는 성지곡에 가서 운동하고 밤에는 쉰다”며 “이처럼 요양을 위해 달방을 찾는 노인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고 말했다.
성지곡을 관리하는 부산시설공단 관계자는 “주말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지만, 평일에는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추자골 체력 단련장뿐만 아니라 녹담숲에서 기체조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성지곡을 활용해 건강을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