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과 잡배들 [아침햇발]

길윤형 기자 2024. 8. 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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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작년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친교의 시간을 함께하며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길윤형 논설위원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지난달 27일 보도자료를 보며 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사도광산은 한국의 동의가 없으면 애초 ‘등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협상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끌고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2015년 7월 군함도(하시마) 등 ‘메이지 시기 산업유산’ 등재 과정에서 얻어낸 좋은 ‘선례’도 있었다. 일본은 9년 전 군함도 등의 등재를 위해 “수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끌려가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들을 잘 활용한다면 최소 당시와 엇비슷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알듯 예상을 크게 어긋난 ‘외교 참패’였다. 일본은 사도광산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노동과 관련해 그 어떤 ‘강제성’도 인정하지 않은 채 이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돌이켜 보면,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벌써 2년째 비슷한 일이 거듭되고 있다. 양국 간 주요 현안에서 일본은 가만히 있는데 한국 홀로 물러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국가 정체성과 직결되는 역사 문제, 거듭 신중하게 생각하며 결정해야 할 안보협력 문제, ‘라인 사태’ 같은 경제 문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1년 반쯤 전 이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그야말로 핵심 당국자로부터 묘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윤 대통령은 이 무렵 한-일 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라는 ‘일방적 양보안’을 내놓은 뒤 방일(2023년 3월16~17일)을 예정해 두고 있었다. 한국이 ‘통 큰 양보’를 한 만큼 일본도 뭔가 ‘상응 조처’를 내놓을 것이란 기대가 커지던 상황이었다. 일본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이 당국자는 뜻밖에도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한국이 먼저 뭔가를 요구해야 일본이 고민할 것 아닙니까. 대통령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외교부 역시 기존 한-일 관계의 박스에 갇혀 있다고 보시는 듯합니다. 한국이 요구를 안 하는데, 그쪽에서 뭔가를 자발적으로 내놓을 리가 없죠.”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통해 한-일의 근대 외교관계가 시작된 뒤,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일본과 협력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믿는 이들이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 사람들을 ‘매국노’와는 다른 중립적 의미의 ‘친일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친일파들을 잡아끈 매력은 한국에 앞선 일본의 ‘선진성’이었다. 동아일보 1930년 1월4일치 2면 왼쪽 상단 기사를 보면, 이 무렵엔 망국의 ‘원로 정객’으로 전락하고 만 박영효(1861~1939)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임오년(1882) 사건(임오군란)의 사죄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보니 일본의 문물이 조선과 비교하여 천양지차가 있음을 발견하고 우리나라가 강하게 되자면 우선 일본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가지게 되었소.”

명문 히토쓰바시대에서 1년간 공부하게 된 부친 등 가족과 함께 1967년 우에노역에 도착한 소년 윤석열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도 그와 비슷했다. 그는 방일 전 요미우리신문 2023년 3월15일치 37면 인터뷰에서 “지금도 대학이 있는 구니타치시가 눈앞에 떠오른다. (일본은) 선진국답게 깨끗했다. 사람들도 솔직하고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바꿔보려 했던 초기 ‘친일파’들 가운데 1910년 강제병합 이후까지 살아남아 ‘매국노’ 소리를 피한 이는 유길준·김윤식·김가진 셋에 불과하다. 이들은 조선과 일본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이익이 온전히 일치할 리 없으니 협력하면서도 꾸준히 갈등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유길준은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김윤식은 병합의 마지막 순간 홀로 “불가”(不可)를 외쳤으며, 김가진은 조선 고관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청일전쟁 개전 때 주조선 일본공사였던 오토리 게이스케의 눈에 비친 그밖의 친일파는 “기회를 타 사리(私利)를 도모하려는 잡배”에 불과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고, 그래서 복잡하고 두려운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제발 자중해야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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