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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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4학년이던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8월 15일 개통했다. 내게 그날은 아침마다 청파동에서 종로5가로 향하는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시간들로부터 해방된 날이기도 했다. 열차는 서서히 움직였고 창밖으로 보이는 전경은 그야말로 원더랜드였다." 얼마 전 시민들로부터 지하철을 이용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공모했는데,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의 한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지하철은 시민의 삶을 추동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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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4학년이던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8월 15일 개통했다. 내게 그날은 아침마다 청파동에서 종로5가로 향하는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시간들로부터 해방된 날이기도 했다. 열차는 서서히 움직였고 창밖으로 보이는 전경은 그야말로 원더랜드였다." 얼마 전 시민들로부터 지하철을 이용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공모했는데,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의 한 대목이다. 무수한 사연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지난 50년의 여정이 시민의 삶, 그 자체였다는 생각을 한다. 1974년 1%에 불과했던 서울지하철의 수송 분담률은 어느새 40%대를 넘어서며 시민의 삶을 깊이 파고들었다. 노선도가 다시 그려질 때마다 생활의 지도도 급속히 바뀌어갔다.
1984년 2호선이 개통되면서 강남역은 청춘들의 명소로 급부상했다. 카페·극장·디스코텍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밀려들며 만남의 일번지였던 종로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30·40대 중에는 강남역 사거리 뉴욕제과나 타워레코드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1985년 3·4호선 개통은 상권의 판도를 뒤흔든 계기였다. 서울 전역이 1시간 이내 생활권으로 좁혀짐에 따라 외곽지역 소비자들이 도심지 상권으로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다. 지하철역 인근 백화점과 쇼핑센터, 역과 연결된 지하상가가 핵심 상권으로 떠오른 반면 도심과 변두리의 중간지대에 있던 주택가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지하철을 이용한 출퇴근이 쉬워지면서 시민들은 지하철역 근처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4호선의 출발지인 상계동 일대에 대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서며 당시 큰 인기를 끌었고, 3·6호선 개통으로 서울 서북부 택지지구 개발에 힘을 실었다. 당시 버스정류장이나 철도역 주변은 땅값이 시세보다 저렴했는데, 생활 패턴이 역세권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지하철역 주변은 오히려 값이 크게 올랐다. 개통 전과 비교해 구파발은 평당 25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양재동은 80만원에서 700만원으로 뛰었다니 역세권의 오랜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
돌이켜보면 지하철은 시민의 삶을 추동한 원동력이었다. 노선과 역이 생길 때마다 그곳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여드는 새로운 길이 됐다. 시민들은 길 위에서 웃고, 울고, 춤추고, 노래했다. 길은 문명의 발전과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길을 연결한다는 것은 문명과 문명, 사회와 사회의 연결을 뜻한다. 길의 힘이 강할수록 문명은 번영했다. 방대한 도로망으로 문명을 이룬 고대 로마는 길의 나라이며 길의 제국이었다.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세계로 통일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참제의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길을 통해 물자가 흐르고 사람이 흐르고 정보가 흘렀다.
앞으로의 50년은 어떤 길일까. "아직 못 가본 길이 갈 길이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명대사다. 끊어진 길을 잇고, 새로운 길을 밝히며, 구부러진 길은 펴기도 하면서 시민의 삶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되는 꿈을 품어본다. 100년 지하철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 길 위에서 길에 길을 묻는다.
[백호 서울교통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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