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위해 양보, 팀 하나됐다”... 양궁·펜싱서 빛난 맏언니 리더십

정아임 기자 2024. 8. 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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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양궁 전훈영(사진 왼쪽)여자 펜싱 윤지수. /뉴시스·신현종 기자

2024 파리올림픽에서 새 역사를 쓴 한국 여자 양궁과 펜싱 여자 사브르 대표팀에서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한 팀 내 맏언니들의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여자 양궁의 전훈영(30·인천시청)과 여자 펜승 사브르의 윤지수(31·서울특별시청)는 이번 올림픽에서 자신의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후배들을 다독이며 팀을 하나로 만드는 ‘양보와 솔선수범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일 대한양궁협회 등에 따르면 대한양궁협회장 겸 아시아양궁연맹 회장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전날 여자 양궁 개인전이 끝난 뒤 전훈영을 찾아와 격려했다. 정 회장은 전훈영을 만나 개인전에서는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대회 기간 내내 후배 선수들을 다독이고 이끈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 세번째)이 3일(현지 시각) 파리 대회 여자 양궁 개인전 시상식 후 현대차그룹 김걸 사장(오른쪽 두 번째)과 양궁 국가대표 남수현·전훈영·임시현, 양창훈 감독, 김문정(왼쪽 첫 번째) 코치와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 맏언니 특권 버리고 후배들에 양보... “동생들이 편해야 나도 좋다”

‘3명 모두 큰 경기 경험이 없다’는 우려에도 출전한 모든 종목에서 여자 양궁 대표팀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데는 전훈영의 역할이 컸다.

30세인 전훈영은 올해 4월 국가대표 선수단에 이름을 올리며 꿈에 그리던 첫 올림픽 출전을 이루게 됐다. 함께 대표팀에 선발된 2003년생 임시현(한국체대), 2005년생 남수현(순천시청)과는 열 살 안팎 나이 차이가 났다.

코칭스태프 등에 따르면 맏언니 전훈영은 ‘선배’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내려놓으며 동생들을 챙겼다고 한다. 파리에서 선수단 숙소를 정할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숙소는 2인 1실로 배정돼 있어 3명 중 1명은 타 종목 선수와 숙소를 써야 했다. 한국식 ‘방장 문화’에서는 맏언니가 막내와 같은 방을 쓰지만 전훈영이 후배들을 생각해 먼저 손을 들어 “탁구 선수와 방을 함께 쓰겠다”고 자청했다.

코칭 스태프가 “태릉 시절도 아니고 타 종목 선수와 열흘 넘게 지내는 게 괜찮겠느냐”고 했지만, 전훈영은 “동생들이 편하게 지내면 나도 좋다”고 ‘쿨’하게 답했다고 한다.

경기장 안에서도 전훈영은 맏언니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활을 빠르게 쏴야 하는 단체전에서 1번 주자로 나서 동생들의 부담감을 덜어줬다. 양궁 단체전은 세트당 120초가 주어지며 3명이 120초 안에 각 2발씩 쏴야 한다. 첫 주자가 빨리 쏠수록 2, 3번 주자는 여유로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지난달 28일 중국과의 여자 단체 결승전에서 전훈영은 5차례나 10점을 맞췄다. 연장 승부 결정전(슛오프)에서도 10점을 꽂으며 금메달 수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전훈영의 리더십으로 여자 양궁 대표팀은 단체전 10연패를 달성했다.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 임시현 선수가 3일 오후(한국 시각)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에서 진행된 양궁 여자 개인 4강전 대한민국 전훈영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인사하고 있다. 2024.8.3/뉴스1

코칭스태프들은 “전훈영의 성격은 예민하지 않고, 오히려 유쾌하고 털털한 편”이라고 했다. 단체전 때에는 가끔씩 엉뚱한 농담을 던지면서 동생들의 긴장을 풀어줬다고 한다.

개인전이 열린 3일 낮에는 경기 결과에 따라 4강전에서 맞붙을 수 있는 임시현에게 장난을 걸며 앵발리드 경기장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등 ‘맏언니 면모’를 보여줬다고 한다.

전훈영의 ‘숨은 활약’ 덕분에 여자 양궁 대표팀은 단체전 10연패뿐 아니라 혼성전, 개인전까지 여자 선수들이 출전한 모든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전훈영은 3일 개인전 준결승에서는 후배 임시현에게 패배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프랑스의 리사 바르블랭에 져 노메달에 그쳤다.

그는 경기 후 “개인전 4강까지 올라 (임)시현이와 재밌게 경기했다”며 “3·4위전 결과는 아쉽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임시현과의 4강전에 대해서는 “시현이와의 경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도 없었다”며 “매 경기 다 똑같은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전훈영은 “양궁 대표팀을 향한 많은 걱정과 우려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전 종목에서 금메달 3개를 땄다”며 “부담이 컸는데 목표를 이뤄냈다. 팀으로 보면 너무 좋은 결과를 내 만족스럽다”고 했다.

대한민국 펜싱 대표팀 윤지수, 전하영, 최세빈, 전은혜 선수(왼쪽부터)가 4일(한국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사브르 단체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수여 받은 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뉴스1

◇ “이기려면 나 대신 후배가 뛰어야” 자진 교체 요청한 맏언니

펜싱 여자 사브르가 단체전에서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인 은메달을 따낸 것도 맏언니 ‘윤지수’의 빛나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막내 ‘라인’이었던 윤지수는 세대 교체가 이뤄지면서 이번 올림픽에 유일하게 다시 출전한 선수였다. 단숨에 대표팀에서 맏언니가 된 것이다. 다른 대표선수는 신예 전하영(23·서울특별시청)과 최세빈(24·전남도청), 전은혜(27·인천광역시 중구청) 등으로 채워졌다.

윤지수는 멤버가 큰 폭으로 바뀌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던 사브르 대표팀을 하나로 뭉치도록 힘썼다고 한다. 특히 ‘커피 타임’을 활용했다. 윤지수는 “점심을 먹고 30분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눴다”며 “펜싱 얘기도 하고, 강아지 등 일상 얘기도 했는데 그 대화가 팀이 하나로 뭉치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곤 태극기 모양의 귀걸이를 맞춰 함께 차고 나왔다.

세계 랭킹 1위인 프랑스와의 4강전에서는 후배가 경기에 뛸 수 있게 자진해서 교체를 요청했다. 팀 승리를 위해 스스로 물러나는 ‘용기있는 결정’을 한 것이다. 윤지수의 과감한 결정으로 전은혜가 대신 들어갔고, 이는 세계 1위이자 홈 팀 프랑스를 꺾는 원동력이 됐다.

윤지수는 자진 교체를 요청한 것에 대해 “프랑스 선수들은 십수년 간 나와 경쟁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이미 파악된 상황이었다”며 “프랑스가 우리 후배들에 대해서는 파악이 잘 안됐을 것이라고 생각해 초반에 점수를 벌린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또 어린 후배들이 패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무대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윤지수가 빠진 채 결승에 임한 한국은 전은혜가 1·4·8번, 최세빈이 3·5·7번, 전하영이 2·6·9번으로 나섰다. 치열한 접전 끝에 한국 여자 사브르 대표팀(세계랭킹 4위)은 3일(현지 시각) 파리 올림픽 여자 단체 결승전에서 우크라이나(3위)에 42대45로 패했다. 하지만 값진 은메달을 얻어내며 한국 여자 펜싱 사브르 단체전 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3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전 준결승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에서 결승 진출이 확정된 한국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왼쪽부터 전하영, 최세빈, 윤지수, 전은혜. 2024.8.3 파리=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ZU

결승전 내내 벤치에서 후배들을 응원한 윤지수는 “(후배들과) 같이 뛰고 있는 느낌이었다. 같이 소리지르고 같이 경기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됐고 설렜다”고 했다.

그는 결승전이 끝난 뒤 “맏언니로서 부담은 정말 많았지만 그만큼 후배들이 그 부담을 하나씩하나씩 덜어줬다”며 “후배들에게 너무 고맙다. 앞으로 선배로서 후배들이 더 펼쳐 나가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윤지수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아빠, 나 올림픽에서 메달 두 개 땄어!”라고 외쳤다. 윤지수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 투수로 프로야구 역대 최다 완투 기록(100경기)을 보유한 윤학길(63) KBO(한국야구위원회) 재능기부위원의 딸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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