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만들어 글로벌 R&D 장기 지원…한국판 '호라이즌 유럽' 필요
"글로벌 연구개발(R&D) 예산이 크게 늘었다고 해도 한두 해 정도만 유지되는 '반짝 예산'이 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글로벌 연구만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해 장기적으로 투자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유럽연합(EU)의 R&D 국제 협력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처럼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글로벌 R&D 예산이 크게 증액되면서 한국이 리드하는 국제 협력 공동 연구가 활성화할 것이라는 과학계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R&D 예산은 지난해 6월 윤석열 대통령이 R&D 국제 협력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기조를 밝힌 뒤 2023년 5075억원에서 올해 1조8000억원으로 3배가량 불어났으며, 내년에는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매일경제는 늘어난 예산만큼 글로벌 R&D 강화 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과학기술 국제 협력 전문가 4명이 참석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는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 김소영 KAIST 국제협력처장, 배영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황성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제협력관 등이 참석했다.
좌담회에 모인 4명의 전문가는 예산 규모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공동 연구자들에게 예측 가능하고 장기적인 지원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구본경 단장은 "공동 연구는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재단이나 펀드를 만들어 꾸준히 투자할 필요가 있다"며 "유럽연구위원회(ERC)나 휴먼 프런티어 과학 프로그램(HFSP) 같은 국제 연구 재단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설립해 장기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EU가 만든 ERC는 기초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펀드로, 다양한 글로벌 공동 연구를 지원하며 노벨상·필즈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했다. 일본이 제안한 HFSP는 연간 약 5000만달러의 기금으로 회원국 과학자의 뇌 과학·인체 기능에 대한 연구·연수를 지원하는 글로벌 펀딩 프로젝트다. 구 단장은 이어 "지원이 중단되면 공동 연구에 지장을 주면서 오히려 국제 사회에서 신뢰도가 하락할 수 있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운영되는 재단 설립이 필수적"이라며 "재단은 연구비 지원은 물론 한국 연구자와 외국 연구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단을 설립해 운용할 경우 각국 연구자 간 지식재산권 공유 문제를 명확히 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점도 제시됐다. 구 단장은 "지식재산권은 연구자들이 직접 협상하기에는 복잡하고 큰 부담이 된다"며 "EU의 연구자 교류 프로그램인 '마리 퀴리 프로그램'처럼 권리 양도 등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만들어 모든 참여 연구자가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기금을 지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엄격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외 우수 연구자의 국내 유치를 위해 글로벌 R&D 허브 기지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배영자 교수는 "한류 열풍으로 한국의 매력도가 상승하면서 젊은 외국인 연구자 유치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며 "서구권 과학자들이 많이 이동하는 싱가포르나 일본 오키나와과학기술대학원(OIST)의 사례를 참고해 외국인 연구자들을 국내에 초빙하는 데 성공한다면 국가 브랜드를 높이고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OIST는 올해 기준 외국인 교원 비율이 64%, 박사 과정 유학생 비율이 80%이며 출신국도 다양하게 분포돼 있는 성공적인 글로벌 교육기관으로 꼽힌다.
한국이 글로벌 R&D를 통해 과학기술 국가 경쟁력 강화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 팬데믹 등 인류 전체 문제에 공헌하며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소영 처장은 "최근 중국의 천인계획(1000명의 외국 인재를 유치해 선진국 첨단 기술 유출을 유도한 정책) 사례처럼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가 이익만 지나치게 추구하면 오해를 살 수 있다"며 "한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펀드를 조성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켜야 선진국으로서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학계가 '예산 나눠 먹기' 같은 세간의 오해를 씻기 위해선 글로벌 R&D 예산이 실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처장은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 정부가 연구 예산을 두 배로 늘렸지만 예산을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면서 연구 성과는 되레 줄어든 사례가 있다"며 "예산 규모보다 분배 방식과 안정성이 중요하고, 성과를 제대로 추적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 교수는 "글로벌 R&D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논문 수에 국한되지 말고 상대 국가와의 신뢰도 상승 등 사회적 자본 측면을 함께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발도상국에 우리의 R&D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 처장은 "한국은 선진국과 개도국, 신흥국 사이의 브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라며 "지난해에 완공된 한·베트남 과학기술연구원이나 현재 신축 중인 케냐 과학기술원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한국의 귀중한 외교적 자원이 된다"고 강조했다. 황성훈 국제협력관은 "전문가들의 의견에 다수 공감한다"며 "정부는 현장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글로벌 R&D 강화 정책을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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