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벽 부순 ‘돈키호테’ 신춘수 “갈수록 객석 뜨거워”
타이타닉 소재 작품 등 또 다른 도전 준비
그의 사무실 한편에는 돈키호테 그림이 있다. 커다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사나이. 7~8년 전 선물받은 그림을 수시로 보며 그는 마음을 다잡는다. ‘뮤지컬계의 돈키호테’로 불리는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다.
“초창기에 제작비와 흥행을 무시하고 도전적·실험적인 걸 많이 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아요. 주변에선 무모하다 했지만, 저는 ‘무모함이 아니라 도전입니다’라고 답하며 제 길을 지켰죠.”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오디컴퍼니 사무실에서 만난 신 대표가 말했다.
그는 2004년 국내에서 하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처음 선보였다. 한 배역에 두명의 배우를 번갈아 출연시키는 더블 캐스팅도 도입했다. 지금이야 멀티 캐스팅이 보통이지만, 당시엔 생소한 방식이었다. 신 대표는 “선과 악을 오가는 힘든 역이기에 배우가 매회 최선을 다하려면 더블 캐스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되돌아봤다. 2007년 서울 강남구 엘지아트센터에 연극 ‘갈매기’를 올릴 때는 객석을 절반 수준인 660석으로 줄이고 무대에 물 20톤을 부어 호수를 만들었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일이 안 풀려 방황하던 시절 뮤지컬 제작사에서 잠시 일하다 이 세계에 빠져들었다. 2001년 오디컴퍼니를 설립한 뒤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등을 줄줄이 성공시켰다. 자신감이 붙자 뮤지컬 본고장 브로드웨이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2009년 한·미 합작 프로젝트 ‘드림걸즈’로 첫 도전에 나섰다. 미국 뉴욕 아폴로 시어터에서 공연하고 미국 투어도 돌았지만, 브로드웨이 입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2014년 ‘할러 이프 야 히어 미’, 2015년 ‘닥터 지바고’를 잇따라 브로드웨이에 올렸지만, 저조한 흥행으로 금세 막을 내려야 했다. 그는 “전체를 이끄는 리드 프로듀서를 공동으로 맡으면서 서로 의견이 갈리는 등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털어났다.
실패는 썼으나 밑거름이 됐다. 당시 쌓은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3전4기’ 도전에 나섰다. 그 결과 ‘위대한 개츠비’를 지난 4월25일(현지시각) 브로드웨이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브로드웨이 시어터(1500석 규모)에서 개막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4년 전부터 현지 스태프·배우와 준비해온 작품이다. 이번엔 단독으로 리드 프로듀서를 맡았다.
“제가 세운 방향에 확신을 갖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갔어요. 시각적 화려함과 풍성한 재즈 음악에 집중했고, 트라이아웃(시범) 공연부터 제작비를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어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지난해 10월 미국 뉴저지 페이퍼밀 플레이하우스에서 펼친 트라이아웃 공연은 호평과 함께 전석 매진됐다. 이는 브로드웨이 개막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개막 초기, 평단의 반응이 썩 좋진 않았다. 원작에 견줘 깊이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미국 최고 권위의 토니상 시상식에서 의상디자인상을 받았지만, 주요 부문은 후보에도 못 올랐다. “속상하고 침울했어요. 위대한 원작의 벽은 높구나, 브로드웨이는 참 냉정하구나 하는 걸 느꼈죠. 이방인 프로듀서가 인정받으려면 완성도를 더 높여야겠다는 오기도 생겼어요.”
그런 그를 다독여준 건 관객의 지지와 사랑이었다. 개막 3주 만에 브로드웨이 성공 지표인 ‘원밀리언 클럽’(주당 매출액 100만달러 돌파)에 들더니, 꼭 100일째인 지난 2일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 현지에 또 다녀왔는데, 갈수록 객석 분위기가 뜨거워지는 걸 느껴요. 화려한 파티 장면에 쇼뮤지컬 요소를 앞세워 즐겁게 해주자는 의도가 통한 거죠. ‘너무 재밌다’며 행복하게 웃는 관객들을 보며 큰 위로와 힘을 얻었어요.”
흥행 성공에 힘입어 극장 쪽이 애초 11월까지 보장했던 공연 기간을 내년 5월까지 연장했다. 지금 분위기라면 이후에도 공연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신 대표는 “초등학생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까지, 한 10년은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신 대표가 공연권을 갖고 있기에 영국 웨스트엔드를 비롯해 스페인,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일본 등 진출도 추진 중이다. 내년 하반기 한국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벌써 또 다른 도전도 채비 중이다. “‘위대한 개츠비’ 이후 브로드웨이에서 저를 보는 눈이 달라진 걸 느낀다”며 두번째, 세번째 작품도 준비하고 있다. 지난 3월 첫선을 보인 일제강점기 배경의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를 글로벌에서 통하도록 다듬으려 한다. 타이타닉호를 소재로 한, 영화와는 또 다른 작품도 개발 중이다.
“커다란 배가 세상의 축소판이거든요. 마지막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은 연주자들 얘기, 배 밑바닥에서 일하던 아시아 노동자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기록 등 온갖 인간 군상의 사연이 많아요. 2년 안에 올리는 게 목표인데, 자유롭게 상상하는 지금 단계가 가장 행복해요.” 갑자기 활기가 도는 눈빛에서 꿈을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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