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보다 '잿밥'...'진영 갈등'에 흔들리는 ARF '예방외교'[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한반도 안보문제가 양비론적인 접근으로 다뤄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지난달 27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외교장관회의를 비롯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가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물론 그건 공식 일정만을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 외교부는 물론, 상당수의 외교 당국자들은 바로 귀국하는 일이 드뭅니다. 물밑 협상 또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ARF는 1994년 아세안 11개국 주도의 지역 협력질서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보협의체를 뜻합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안보 질서가 그려졌다면, ARF는 아세안 중심으로 짜인 '약소국 연합'의 안보 질서를 전 세계로 확장하겠다는 인식을 깔고 있습니다.
특히, ARF는 견제와 균형이 중요한 강대국 주도 질서와 사뭇 다른 외교를 지향합니다. 어떤 적대 관계에 있더라도 대화를 통해 분쟁을 예방하고자 하는 겁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면서 ARF는 어느새 한미일과 중러 등 27개국이 참여하는 역내 다자안보협의체로 발전을 했습니다.
ARF 의장성명이 뭐길래… 폐막식 이후에도 이어진 협상전
아세안과 한중일, 북중러 모두 포용하겠다는 ARF 회의에서는 '안보위협 공감대'가 형성되기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대신 한번 성명에 명시되면 진영을 초월한 국제현안이라는 '각인 효과'가 생깁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러시아 변수가 '한 스푼' 더해졌습니다. 기존 북한에 러시아라는 '골칫덩이'가 추가됐다는 얘기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반도 주변국 27개국이 총출동한 ARF 회의장에선 소위 '불량국가'인 북한과 러시아의 현실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습니다.
ARF 회의장은 의장국 라오스의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NCC)에 마련이 됐습니다. 그리고 회의장에선 북한과 러시아 대표가 다른 나라 참석자들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고립된 모습을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측 수석대표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고, 북측 대표인 리영철 주라오스 대사는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과 잠깐 대화를 나눴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 회의자료만 뒤적였습니다.
ARF 비공개회의에선 격한 말도 오갔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인도·태평양 권역 국가들의 안보협력을, 북한은 미국 주도 한미일 안보협력을 집중 겨냥해 날을 세웠다고 합니다. 여기에 한미일 3국은 북한의 불법 핵무기 개발과 러시아의 일방적 우크라이나 침공을 저격했습니다. 법에 기반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해결도 촉구했습니다.
중국 또한 러시아와 함께 미국 주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협력을 비난하긴 했지만, 강한 수위의 발언은 자제했다고 합니다. 결국 한반도 안보와 관련한 핵심 현안들을 두고 의장국인 라오스는 ARF 폐막식 때까지 그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했습니다.
"ARF 의장국과 한반도 안보와 관련해 문구를 조율하면 바로 북한 대표단이 자기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달려갔어요. 그러면 저희도 다시 의장국을 찾아가 북한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ARF 성명 문구를 두고 북한과 기싸움을 벌인 경험이 있는 한 당국자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올해도 이런 싸움이 반복됐습니다. 또한 올해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습니다. 북러 군사협력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어떻게든 북러 협력을 한미·한미일 안보협력의 '견제 장치'처럼 프레임하려는 북한과 러시아의 시도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ARF 의장성명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조태열 외교장관이 거듭 북러 군사협력을 규탄했지만, 하나도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NATO와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협력체 협력을 비판한 중국과 러시아의 외침도 성명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핵 비확산 및 군비 통제 메커니즘에 대한 약속이 감소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모든 국가가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약속을 유지하고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는 원론적 외침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의장성명은 ARF가 끝나고 사흘이 다 되도록 나오지 못했습니다. 북한 관련해서도 "최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급증과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는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우려스러운 동향"이라는 기존의 입장만 되풀이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도 "주권, 정치적 독립 및 영토 보전에 대한 존중을 재확인했다"며 "적대 행위의 즉각적 중단과 평화적 해결을 위한 유리한 환경 조성을 촉구한다"는 입장이 전부였습니다.
남북 수석대표 '투샷' 가능케 한 ARF…아세안 중심적 안보강화 기능은 무력하기만
ARF. 참으로 '계륵' 같은 회의체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언제나 결말은 소소하고 성과는 미미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ARF가 아니었다면, 리 대사를 향해 인사를 시도하며 복합적 외교 접근을 시도하는 조 장관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을 겁니다. 조 장관은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에 복귀하라는 말을 하려고 다가갔는데 악수조차 안 됐다"면서 "민망했다"고 했죠. 사실 이런 접촉 하나하나가 모여 '외교'라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지만, ARF가 아니면 외교의 현장을 목격하기 어렵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ARF는 '포럼', 즉 대화의 장 그 이상 그 이하의 역할도 못 해내고 있습니다. 비견한 예로, 남중국해 문제는 중국과 아세안이 준수할 수 있는 행동준칙(CoC)을 제정하자고 합의하고도 20년 넘게 진전이 없습니다.
ARF는 미얀마 군사 쿠데타 문제도, 북러 군사협력도, 아세안 내 그 어떤 군사적 갈등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ARF 안보의식을 반영한 의장성명은 의장국이 어디냐에 따라 표현과 내용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ARF에서도 중국과 긴밀한 라오스와 캄보디아, 미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필리핀과 싱가포르 등의 이견이 엿보였다고 하죠.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흔들리는 '아세안 중심성'
그렇다고 ARF를 '무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ARF는 1990년대 초~2000년대까지는 분쟁을 예방하는 외교적 가교 역할을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핵실험 및 군축으로 갈등하던 인도와 파키스탄,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하는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 간 초보적인 신뢰구축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당시 ARF는 새로운 형태의 소다자 안보협의체로서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2010년대 미중 전략경쟁과 함께 강대국들의 적극적인 아세안 포섭전략에 아세안뿐 아니라 ARF의 몸값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ARF의 약해진 구심력입니다. 과거처럼 유의미한 역할을 기대해볼 수도 있겠지만, ARF 회의장 분위기를 보면 영 힘들어보입니다. 특히 ARF에 참가했던 중요 역외 국가들이 역내 핵심 협력국가들과 새 안보협력 체계 다지기에 더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ARF 출장을 계기로 베트남,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몽골 등 중요 안보협력국가들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미일 2+2 외교·국방 장관 회담뿐 아니라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때 한미일 안보협력 프레임워크(TSCF) 협력각서가 체결됐죠.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반서방 유라시아 안보기구 구축을 위해 브릭스(BRICS) 가입을 신청한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습니다. 왕 부장이 ARF 참석을 위해 라오스를 방문하자마자 만난 외교장관은 아세안 국가가 아닌 러시아의 라브로프 장관이었습니다. 아세안과의 외교관계를 관리하면서, 우선순위는 직접적인 국제안보 구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대국과의 협의에 있는 것입니다. 블링컨 장관도 라오스 도착이 늦어져 예정됐던 주요 양자회담 일정을 취소하면서 중국과의 양자회담만은 고집했으니 말입니다.
페니 웡 호주 외무장관도 라오스 출장 후 일본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방한 계기 여성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우리를 둘러싼 지역·글로벌 질서가 다시 그려지는 변환에 시기에 직면했다"며 "이 새 질서 재편과정에서 IP4(인도태평양 4개국 파트너)와 쿼드, 한-호주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력은 중견국들의 입지를 다지고 주변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중요 장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ARF를 통한 결속이 아닌 양자 또는 강대국 주도의 소다자 안보협력체계를 통한 결속으로 정세 안정을 도모하는 접근입니다.
관계 국가들의 입장을 확인하는, 말 그대로 '포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ARF. 말 그대로 계륵입니다. 우리는 이 '계륵'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요. 가뜩이나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난도 외교셈법을 풀어야 하는데, 대(對)아세안 전략도 짜기 어려워진 한국입니다. 참고로 ARF는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다자회의이기도 합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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