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일제 실험’ 1년…세브란스 간호사들, 삶의 질은 나아졌을까
[주간경향] 한국에서 일하면 시간이 부족하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말고 밥 먹고 잠자는 등의 개인 시간과 친구를 만나고 취미활동 등을 할 수 있는 여가 말이다.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일과 삶의 균형’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하루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평균 15.1시간, 한국은 14.8시간(최신자료 2018년 기준)이다. 상급종합병원 간호사라면 13시간대로 떨어진다.
세브란스병원노동조합은 2023년에 1년간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주 4일제 시범사업’을 했다. 3개 병동(신촌 2개·강남 1개)에서 30명(상·하반기에 5명씩 병동별 10명)이 임금 10% 삭감을 수용하고 참여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365일 24시간 문을 여는 병원에서, 중증도가 높은 환자가 많은 상급종합병원에서 정부나 기관 주도가 아닌 노사 합의를 통해 이뤄진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세브란스병원노조와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는 지난 7월 23일 국회 토론회에서 지난해 시범사업 성과를 발표했다. 이 실험을 통해 ‘주 4일제를 하면 노동자의 일과 삶의 균형을 비롯한 노동환경이 개선된다’는 것이 확인됐다. 당연한 결과 같지만, 주관적·객관적 지표로서 이를 확인한 것은 국내에선 사실상 처음이다. 그간 민간 사업장에서 주 4일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진한 사례들이 나왔으지만 연구집단과 함께 주 4일제 실험을 설계하고, 이 사업의 성과를 분석·평가한 건 세브란스병원이 처음이었다.
권미경 세브란스병원노조 위원장을 지난 7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노조 사무실에서,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 소장을 지난 7월 31일 서울 중구 센터 사무실에서 각각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직률’ 감소가 의미하는 것
주 4일제 실험에 참여한 신촌 병동의 2023년 사직률은 전년 대비 3.6~6.2%포인트 감소했다. 강남 병동은 전년 대비 8.8%포인트 줄었다. 신촌 1개 병동에서 지난해 사직률은 ‘0%’였다. 전체 실험 병동의 병가 사용(1·2인실 병동 제외)은 시행 이전보다 절반가량 감소했다. 고객소리함에 들어온 연간 친절 건수는 1.5~2.6배로 증가했다. 수면장애, 근골격계 질환, 우울감 등이 줄었다. ‘프리젠티즘’(아파도 출근)도 감소하는 경향이 확인됐다.
두 사람은 주요 결과 가운데 ‘사직률 감소’를 가장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3월 대한간호협회가 병원간호사회의 ‘2023 병원간호인력 배치 현황 실태조사’ 자료를 재분석한 결과, 2022년 한 해 동안 병원을 사직한 간호사의 80.6%가 5년 미만 근속자였다. 해마다 신규 간호사의 사직률은 40~50% 수준. “노조에서 이 실험을 시작한 출발점은 높은 사직률이었습니다. 신입 간호사를 교육하는 데 몇 개월에서 1년 가까이 걸리는데, 그 전에 떠나버리는 거죠. 동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껏 병원 간호사가 정년퇴직한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정년퇴직 사례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권미경 위원장)
김종진 소장은 “중증도 높은 환자가 있는 병동에서 간호사 사직률이 0%가 나왔다는 건 주 4일제 효과 말고는 해석이 어렵다”며 “심리적 계약 관계, 즉 병원에서 당장 이걸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예측 가능한 기대치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직률이 감소하면 노동자는 단절 없이 경력을 이어가고, 병원은 신입 직원을 교육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든다. 환자는 숙련도 높은 간호사의 간호를 받을 수 있다. 김종진 소장은 “사학연금 가입 대상인 대학병원이 아닌 다른 사업장이라면 퇴직자에 지급할 고용보험의 실업급여가 나가지 않는데, 이런 사회경제적 효과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출근일수 감소로 일과 삶의 균형 맞춰
세브란스병원 3교대제 병동의 간호사는 하루 평균 9~10시간 내외 일을 하고 휴식시간은 4~15분 남짓, 식사시간은 10분 미만으로 조사됐다. 주말 근무는 월평균 8~9일에 달했고, 야간 근무도 5일 정도 발생했다. 지난해 주 4일제 참여 간호사의 월평균 평일 근무일은 17.4일에서 12.6일로 4.8일 감소했고 휴무는 3일, 휴가는 0.8일 증가했다. 근무일이 줄면서 노동시간은 연간 469시간 20분 감소했다. 여기에 출퇴근 시간(연간 52시간 36분)도 줄면서 생활시간은 연간 521시간 56분이 늘어났다.
이번 실험에서 연구진은 4차례 설문을 진행하고 2차례 면접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주 4일제 근무자의 행복도(10점 만점)는 1차 조사 5.3점에서 4차 조사 때 6.2점으로 올랐다. 일과 삶 균형 정도는 1차 조사 3.7점에서 4차 조사 5.5점으로 높아졌다. 자녀가 있으면 만족도가 더 높았다. ‘시간의 쓰임’도 달라졌다. 주 4일 근무자는 미디어, 게임 등을 제외한 교제, 육아돌봄, 교육학습, 스포츠,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는 어쨌든 하루 더 휴식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그게 주 5일제 근무하면 일주일에 이틀밖에 못 쉬니까, 지금까지 일하면서 길게 쉰 적이 거의 없는데, 이제 임금이 좀 깎이더라도 나한테 또 언제 있을지 모르는 기회니까 6개월 정도는 쉬면서 다니고 싶고, 다른 것도 좀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 주 4일제로 쉬는 시간이 느니까 몸이 회복돼요. 여가활동 시간이 좀 늘어나고 일 말고 다른 거 하는 시간이 좀 늘어나니까 스트레스에서 많이 벗어나서 좀 밝아지는 느낌이에요.”(면접참여자 A)
“일단 변화는 휴가와 쉬는 날이 많으니까 여가도 즐길 수 있고, 애들 돌보는 시간도 많아지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던 것 같아요. 한 달에 쉬는 날이 늘어 애들하고 집에서 같이 하는 시간도 늘고 주말에 쉴 때 나들이, 여행도 되게 많이 가고 해서 육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진짜 좋은 것 같아요.”(면접참여자 B)
권미경 위원장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아빠들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젊은 후배들은 ‘집-병원-집’의 일상에서 벗어나 공연을 보며 여가를 즐기고, 사람을 만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무엇보다 건강을 챙기게 됐다”며 “시범사업 참여 병동에선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한다”고 했다.
노조에서는 주 4일제 요구안을 만들기까지 해외 사례 검토를 비롯해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또 간호사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여러 노력을 선행했다고 한다. “인수인계 시간을 줄여보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퇴근을 독려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기존 연차를 더 많이 붙여 쓰자는 제안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효과가 떨어지고 (임의적인 것이라) 쉬는 것이 예측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출근일수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권미경 위원장)
■주 4일제 1년 실험, 다음의 과제
권미경 위원장은 지난 1년의 성과를 두고 “노동자들의 삶이 좋아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주 4일제가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노조 입장에서는 ‘그다음’이란 과제를 받아들었다”고 했다. 올해는 같은 조건에서 병동 2개를 늘려 신촌 3개 병동, 강남 2개 병동(병동별 10명씩·총 50명)에서 주 4일제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노조는 내년에도 사업을 확대·지속하는 것을 목표로 교섭을 막 시작한 단계다. 올해 상반기 의·정 갈등으로 인해 병원 사정이 안 좋아진 것은 걱정되는 부분이다. 그는 “지금은 병동, 3교대제, 간호사 이렇게 제한이 있는데 이제는 상근직 간호사를 비롯해 누구나 신청을 하면, 꼭 5명이 아니더라도 6개월이든 1년이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모델이 저희 안에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나 재정이 관건이다. 이번 실험에서 각 병동에 대체인력 1.5명이 추가 투입됐다. 세브란스병원 3개 병원(신촌·강남·용인)에서 일하는 간호사 인력은 약 6000명. 지난해 10월 중간보고회 당시 연세의료원에 따르면 주 4일제를 전체 간호사에 도입하려면 연간 약 440억원이 더 필요하다.
김종진 소장은 “보건복지부가 지금 간호사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3교대 근무 시범사업’을 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주 4일제도 시범사업으로 추진해볼 만하다”고 했다. 그는 “세브란스병원 사례를 전면 적용하기 어렵다면 국립대병원, 특수목적 병원, 지방의료원 등 권역별로 30~40개 병원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다”며 “정부 재정 혹은 건강보험 재정이 투입되는 ‘시범사업’이라면, 임금 삭감 없이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민간 병원 중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한다면 중소·영세 사업장 위주로 정부가 추가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볼 수 있다고 했다.
지난 7월 23일 국회 토론회에서 복지부는 주 4일제 시행을 확대하려면 병동의 안전사고 감소나 환자의 의료비 경감 등의 추가적인 데이터가 필요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김종진 소장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한 건 노조에서만 연구비를 내면서 의학적으로 분석이 이뤄지지 못했고, 사례자 수가 적어서 고급 통계를 내기에 한계가 있다”며 “복지부 말대로 근거 데이터가 더 필요하다. 복지부가 시범사업을 진행하면 오히려 민간에서 하는 것보다 건강보험 데이터 등 방대한 자료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간호사 직군으로 한정해보면 주 4일제만이 노동환경 개선책은 아니다. 예측 가능한 교대제, 간호사 1명당 환자 수 줄이기, 주 4일제 등 적용 가능한 정책을 병원 상황에 맞게 교차 적용하면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김종진 소장은 말했다.
■주 4일제, 확산될 수 있을까
권미경 위원장은 “노조는 계속 ‘우리는 현장 사례를 하나 만든 것뿐이다’라고 이야기한다”라며 “지방의료원이라든지 인력 수급을 힘들어하는 공공영역 병원들에서부터 다른 병원들까지 주 4일제를 적용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최근까지도 많은 사업장에서 문의가 와 요구안 만들 때 회의 자료까지 다 공개했다”며 “우리 사례가 변화를 유인하길 바란다. 사회 전체적으로 주 6일 일하다 주 5일제가 도입된 것처럼 주 4일제가 법제화·제도화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주 4일제가 확산할 수 있을까. 병원, 철도, 공항 등 1년 내내 운영되는 사업장에서 주 4일제를 도입하면 서비스를 주 4일만 하고 3일은 중단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주 4일만 일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동주민센터, 은행 등 시민 편의성이 중요한 사업장은 주 5일 서비스를 유지하면서 역시 그 안에서 노동자가 주 4일만 일한다. 두 경우에선 대체인력을 투입해야 하고 일자리 나눔 효과가 있다. 다만 중소·영세 기업의 인건비 부담 증가 등을 들어 경영계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김종진 소장은 “한국사회에서 주 4일제를 단번에 전면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며 “예산 문제도 크기 때문에 우선은 업종별·유형별로 한 3년 시범사업을 해보면서 그동안 다양한 오류들도 찾아내 바로잡으면서 우리와 적합한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당장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지 않더라도, 장시간 노동 문제 해소나 일과 삶 균형 지원 등의 명목으로 정부 주요 사업의 예산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병원과 같은 공공성이 강한 사업장부터, 중대재해 발생 빈도가 높은 사업장을 우선해 추진하면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정책 취지에 부합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OECD 통계를 보면 2023년 기준 한국은 연간 노동시간이 1872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1742시간)보다 긴 편이다. 독일(1343시간), 덴마크(1380시간) 등은 한국보다 훨씬 적고 가까운 일본도 1611시간이다. 김종진 소장은 “한국은 1953년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진 이후 노동시간이 계속 증가했고, 2000년대 들어서야 주 5일제를 하면서 감소세로 돌아섰다”며 “1950년대 이후부터 노동시간이 지속해 줄어든 독일 등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연간 노동시간 1500시간대까지 내려갔을 때만이 진정으로 돌봄 성평등이 가능하고, 지역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며, 기후위기에 조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요즘 ‘파리올림픽’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지하철을 운영하는 파리 교통공사가 주 4일제 시범사업을 하고 있어요. 세계 곳곳에서 지자체별로, 기업별로 주 4일 실험을 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주 4일제가 아마 전 세계적으로 언젠가 우리가 해야 할 근무 형태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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