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는 게 낫지 않겠어?" 38분간 정전 중단됐는데…교체 거부한 에이스 책임감, 감독은 감동받았다
[OSEN=대전, 이상학 기자] “숙명이죠, 숙명. 현종이한테 숙명이지 않을까.”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이범호 감독은 지난 3일 대전 한화전을 앞두고 양현종(36)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근 4연패로 팀이 주춤한 상황에서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는 양현종을 두고 “팀의 에이스라는 게 어려운 상황에 올라가서 이겨내주는 것이다. 현종이한테 숙명이지 않을까. 항상 그런 상황에 많이 등판해줬으니 오늘도 잘 던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2회 뭔가 꼬였다. 1사 후 안치홍의 타구가 1루수 맞고 우측에 빠지는 안타가 됐다. 이어 하주석을 유격수 땅볼 유도하며 병살을 기대했다. 그러나 유격수 박찬호가 한 번에 잡지 못하고 공을 앞으로 흘리더니 중심을 잃고 2루로 던진 게 빠져 우측 외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송구 실책으로 1사 2,3루 위기 상황이 됐다. 여기서 다음 타자 최재훈에게 초구에 홈런을 맞았다. 시속 143km 직구를 몸쪽으로 넣었지만 최재훈의 배트에 걸려 좌측 담장 넘어가는 스리런 홈런이 됐다. 실책 이후 홈런으로 흐름이 나빴다.
진짜 더 당혹스러운 순간은 그 다음이었다. 이원석을 유격수 땅볼 처리한 뒤 요나단 페라자 타석. 양현종이 초구를 던지기에 앞서 갑자기 야구장 전원이 나갔다. 조명탑 불빛이 꺼지고, 전광판은 깜깜이가 됐다. 폭염으로 인한 전력 사용량 급증으로 전기설비가 부하를 견디지 못해 오후 6시33분부터 4분간 정전이 됐다. 심판진이 경기 중단을 선언하면서 그라운드 위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은 다른 어떤 선수보다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마운드 위에서 한창 공을 던지고 있던 중 황당하게 내려온 양현종의 리듬이 깨질 가능성이 높았다. 정전 시간은 4분으로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전력을 다시 공급하면서 조명탑과 전광판 등 주요 설비가 정상 작동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오후 7시11분 경기가 재개되기까지는 38분이 걸렸다.
보통 우천 중단으로 30분 이상 경기가 중단되면 공을 던지던 투수는 어깨가 식어 보호 차원에서 교체되기 마련. 정전으로 인한 중단 시간이 길어지자 KIA 코칭스태프도 고민에 빠졌다. 4연패로 팀이 급한 상황이지만 에이스의 몸을 신경 안 쓸 수 없었다. 이범호 감독과 정재훈 투수코치가 “30분 이상 길어질 수 있는데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면서 교체 의사를 양현종에게 전했다.
양현종이 교체 권유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제가 최대한 컨디션 조절하면서 던지겠다”며 투구 의지를 보였고, 38분이 흐른 뒤에도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페라자를 헛스윙 삼진 잡으며 어느 때보다 길었던 2회를 마무리한 양현종은 3회 2사 1,3루, 5회 무사 1,2루를 실점 없이 극복하며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6회 첫 삼자범퇴로 퀄리티 스타트에 성공한 양현종은 6이닝 7피안타(1피홈런) 1볼넷 7탈삼진 3실점(2자책)으로 임무를 마치며 KIA의 7-3 역전승을 이끌었다. 시즌 8승(3패)째를 거두며 평균자책점을 3.66에서 3.60으로 소폭 낮췄다.
경기 후 양현종은 “팀이 연패 중이라 부담도 많이 됐는데 선수들 모두 연패를 깨기 위한 마음이 컸다. 연패가 길어지면 순위 유지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더 열심히 던졌다”고 말했다. 지난 5월25일 광주 두산전도 7이닝 7피안타 무사사구 4탈삼진 1실점(비자책) 호투로 KIA의 4연패를 끊어낸 바 있는데 이번에도 양현종이 해냈다. 개인 선발승은 아니지만 지난 6월6일 광주 롯데전(6이닝 5피안타 1피홈런 1볼넷 5탈삼진 3실점), 7월28일 고척 키움전(6이닝 4피안타 1볼넷 3탈삼진 3실점 무자책)도 모두 3연패 탈출의 발판이 된 호투를 했다.
이날은 정전 중단 변수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였다. “처음에는 (전기가)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30분 이상 길어질 수 있다고 해서 감독님, 코치님이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고 얘기하셨다. 그래도 내가 선발로 던진 경기라 그렇게 바꾸기가 그랬다. 어제(2일) 중간투수들이 고생하기도 했고, 내가 최대한 컨디션 조절하면서 던지겠다고 말씀드렸다. 크게 무리가 안 갔다”는 것이 양현종의 말이다.
38분간 중단된 사이 어깨와 몸이 식지 않게 계속 걸어다니며 움직였다. 그는 “일부러 라커룸에 안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면 에어컨 찬바람이 있고, 땀이 식으면 다시 나왔을 때 더 더울 것 같았다. 최대한 밖에 나와서 걸으려고 했다”며 “초반 실점을 했지만 우리가 1점씩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5회 (김)도영이 홈런으로 역전하면서 팀 분위기가 많이 올라와다. 이기는 상황 되면서 나도 점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던졌다”고 했다.
이범호 감독도 경기 후 양현종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감독은 “연패를 끊고자 하는 선수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경기가 도중에 중단돼 흐름이 한 차례 끊기긴 했지만 양현종이 끝까지 6이닝을 책임져주면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됐다. 베테랑으로서 끝까지 책임감을 잃지 않은 모습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고 진심을 전했다.
이날까지 양현종은 시즌 21경기에서 127⅓이닝을 던지며 8승3패 평균자책점 3.60 탈삼진 92개 퀄리티 스타트(QS) 12회를 기록 중이다. 이닝 5위, 평균자책점 7위, QS 공동 7위로 국내 투수 중에선 이닝 1위, 평균자책점·QS 2위로 36세 나이가 무색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양현종이 선발로 나온 21경기에서 KIA는 17승4패로 승률이 81.0%에 달한다. 규정이닝 투수 중 1위.
양현종은 “내가 나가는 경기에서 우리 팀이 거의 진 적이 없다. 운이 많이 따랐다. 내가 나가는 날 야수들이 더 집중하는 것이 느껴진다. 꼭 내가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나갈 때마다 팀이 이긴다면 좋다. 좋은 승률을 이어나가고 싶다”며 “이번 주 들어 연패를 하고, 점수를 많이 준 경기로 충격도 받았는데 금방 이겨낼 거라고 생각한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고 자신했다. 최근 8경기 2승6패에도 불구하고 KIA는 2위 LG에 5.5경기차 1위로 여전히 독주 태세를 풀지 않고 있다. 그 중심에 양현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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