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구 절반이 ‘노비’...청렴한 관리 이참판도 노비 758명 부렸다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8. 4.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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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구조의 변화로 보는 한양의 도시사
청해 이씨 집안의 노비가족(일제강점기). 조선은 부모 중 한명이라도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제’를 유지했다. ‘일천측천제’는 노비증가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사람이 금수로 취급되니 어찌 법이라 할 것인가(人類而處以禽獸, 豈法也哉).”

실학자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의 내용이다. 유형원의 외가 6촌 동생인 이익(1681~1763)도 <성호사설> 에서 “한번 천한 종이 되면 천만 년이 가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학대와 고통은 천하와 고금에 없었던 일이니(一為賤隷千萬世不能免, 焉虐使困苦天下古今之未始有也)···”라고 개탄했다.

조선시대 노비(奴婢·남자종, 여자종)는 인격체가 아닌 짐승으로 취급받던 신분계층이었다. ‘말을 알아듣는 가축’으로서 재산목록 중 가장 값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양반 사족(士族)들은 재산증식을 위해 노비 늘리는데 혈안이 됐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이애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는 그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준다. 1494(성종 25)년 이애 남매가 부친 사망 후 재산을 합의로 분할하고 작성한 문서다. 이애 남매의 부친 이맹현(1436~1487)은 본관이 재령으로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을 지냈고 청백리에 봉해졌다.

<화회문기>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맹현이 가진 노비의 수는 한성부와 전국 71개 군현에 걸쳐 총 758명이다. 청렴한 관리의 상징이라는 청백리가 이런 수준이니 다른 고관 벌열(閥閱) 가문의 노비가 얼마나 많았을지는 쉽게 짐작 간다. 이맹현의 노비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서울이 147명(19.4%)이며 다음으로 함경도 함흥 67명(8.8%), 경상도 함안 49명(6.5%), 전라도 임실 32명(4.2%), 경기도 임진 28명(3.7%) 등이었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서울이 제일 많다. 서울은 조선 팔도의 여러 고을 중 노비가 가장 많은 ‘노비의 도시’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한양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 양반은 16% 불과
조선말 고위 관리들의 당당한 모습(1884년). 외무아문(외교부) 고위 관리들이다. 왼쪽 세번째부터 독판(장관) 민영목, 협판(차관) 김홍집, 협판 홍영식의 순이다. 홍영식은 다리를 꼰 채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퍼시벨 로웰 촬영)]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계급은 모두가 잘 알듯 양반, 중인, 상민, 노비 4가지로 구분된다. 조선은 사족의 나라였고 모든 특권은 양반이 독점했다. 반면, 노비는 소유와 매매의 대상일 뿐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도 박탈당한 최하층의 계급이었다. 조선시대 서울에 살았던 신분별 인구수는 얼마였고 또한 그들의 각기 삶은 어떠했을까.

1663년(현종 4) 작성된 <강희이년 계묘 식년 북부장호적(이하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을 통해 17세기 서울 백성의 개략적인 신분구조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북부장호적>에는 한성부 서부(마포·영등포) 총 16계(契·마을), 681가구의 거주지, 나이, 직역 및 신분, 가족구성원 등이 기재돼 있다. 신분별 가구의 점유율은 양반층 16.6%(113호), 중인층 0.6%(4호), 상민층 29.5%(201호), 노비층 53.3%(363호)이다. 15세기 말 자료인 <이애 남매 화회문기>와 큰 차이가 없다.

이에 반해 <단성현 호적대장(단성향교 소장)>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인 1678년(숙종 4) 경상도 단성현(산청)의 신분별 비율은 양반층 6.2%, 중인층 0.6%, 상민층 60.3%, 노비층 32.9%다. <대구부 호적대장(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에 의하면, 1690년(숙종 16) 대구부의 신분별 비율도 양반 9.2%, 상민 53.7%, 노비 37.1%였다.

서울은 양반과 이들에게 예속된 노비가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지방 일수록 상민의 비중이 높았던 것이다. 양반이 행세를 하려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야 한다. 벼슬자리가 많은 서울에 양반이 집중된 이유다. 그렇더라도 벼슬자리는 한정돼 있었고 따라서 서울의 관리도 소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17세기 후반 한양의 관원 숫자를 제시한다. 이에 의하면, 1품관에서 9품관까지 문무 관리는 겨우 595명에 불과했다. 문무관리는 가족(5인 기준)을 포함하더라도 총 2975명으로 3000명에도 못 미친다.

관직에 오른 양반은 봉급인 녹봉, 토지인 과전(科田), 공신전(功臣田)을 받았다. 녹봉은 국가재정에서 지출되는 만큼 풍족한 양은 아니었다. 녹봉은 품계에 따라 18과(科)로 등급을 나눠 보통 매년 춘하추동 네 차례 곡식과 면포로 지급했다. <경국대전>을 보면, 정1품 관직은 제1과로서 쌀 17섬(石·2.45t·1석=144㎏), 콩 12섬(1.7t), 포 6필, 저화(楮貨·지폐) 10장이었다. 종9품은 제18과로 쌀 3섬, 콩 1섬, 포 1필, 저화 1장이었다. 최고와 최하 등급의 급여차는 쌀을 기준으로 6배가 난다.

노론세력 권력 독점하며 양반들도 양극화...다수는 도시빈민 전락
관리의 행차(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녹봉은 광흥창(마포 창전동)에서 내줬다. 관원이 직접 받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대체로 대리인을 시켰다. 녹패(祿牌·녹봉 인수증)를 제시하고 녹패에 기재된 양 만큼 수령했다. 녹봉의 착복과 부정수급도 비일비재했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9월 11일 기사는 “상사는 상사대로 사납게 굴고 아랫 것들도 앞다투어 마구 들어와서 곡식의 좋고 나쁨과 분량의 많고 적음을 놓고 제멋대로 퇴짜를 놓거나 고르기도 한다. 쌀이나 콩을 흩뿌려 짓밟기도 하고 창고담당 아전을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고 했다.

조선후기 노론 중심의 경화(京華)사족들이 조정의 권력을 독식하면서 양반층도 극심한 신분 분화가 일어난다.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는 “오늘날 조정에서는 문벌을 기준으로 사람을 쓰니 문벌이 낮은 사람은 모두 태어나지마자 미천하게 된다”고 했다. <사마방목(司馬榜目)>은 소과에 급제한 진사·생원의 성명, 생년간지(干支), 본관, 주소, 아버지의 벼슬, 형제 등을 상술한다. <조선시대 서울의 사족연구(최진옥·1998)>의 연구에 의하면, 현전하는 186회분의 <사마방목>을 분석한 결과, 생원·진사 합격자 중 거주지가 기록된 사람은 총 3만8386명이었다. 도시별로는 서울이 1만4338명(37.4%)으로 압도적 1위이고, 이어 안동 783명(2.04%), 충주 624명, 원주 570명, 개성 569명, 평양 529명, 공주 512명 등의 순이었다. 경기도권에서는 양주 349명, 광주 344명이었다.

양반가족(1904년). 조선후기 이후 일부 성씨들이 권력과 벼슬을 독점하면서 양반사이에서도 신분 분화가 급속하게 일어났다.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상류증 가족(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성씨별로는 왕족인 전주 이씨가 1382명으로 가장 많았고, 파평 윤씨 454명, 남양 홍씨 413명, 청송 심씨 367명, 연안 이씨 347명, 안동 김씨 332명, 청주 한씨 313명, 안동 권씨 304명, 동래 정씨 297명, 한산 이씨 278명, 대구 서씨 270명, 평산 신씨 253명, 풍양 조씨 239명, 의령 남씨 225명, 해평 윤씨 209명 등이었다. 서울의 경화사족 가문에서 집중적으로 생원 진사 합격자가 나왔던 것이다.

순서는 대과 급제자도 거의 동일하다. 특정 성씨나 집단이 유전적으로 우월할 수는 없다. 가문을 배경으로 형성된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공개경쟁 선발제라는 과거시험마저 혈족끼리의 관직승계 수단으로 악용됐던 것이다. 몰락한 서울의 사족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사족은 상공업이 금지됐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평민과 다름없이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상공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중인·상민, 도시와 상업 발달과 함께 서울의 주요 주민으로 부상
중인은 애매한 신분이다. <홍재전서> 제49권 ‘명분(名分)’에서 정조(재위 1776~1800)는 중인으로 장교, 의원, 역관, 율관, 화원, 사자관(寫字官·왕실기록물 작성 관원) 등의 기술관을 꼽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부류로 ‘시정(市井)’이라 해서 각사(各司)의 서리와 시전상인 등을 언급한다.

이 기준에 근거해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고동환·2007)>는 18세기 중인 신분의 인구를 기술직 1700여 명, 경아전(중앙관청의 하급관리) 1500명, 군영 장교가 4005명, 시전상인이 6000여 명 등 총 1만3200여명으로 추계했다.

상민 역시 중앙관청의 하급 관속이 되기는 했지만, 소상인, 수공업자, 임노동자, 군역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봉건적 구속이 느슨해지며 지방에서 유입된 하층민들이 상민에 합류됐다. 조선은 농민이 천하의 큰 근본인 사회였지만 농토가 희박한 서울에서는 상인들이 주요 주민으로 성장했다.

<영조실록> 1768년(영조 44) 12월 18일 기사에서 국왕 영조는 대신들과 비국(비변사) 당상들과 대면한 자리에서 “서울의 근본이 되는 백성으로, 하나는 상인(市民)이고 하나는 공인(貢人·어용상인)이다”라고 선언했다. 서울에 주둔하는 삼군영의 군사도 상민들이었다. 삼군영 군사는 훈련도감 5000명, 어영청 1000명, 금위영 2000명 등 1만명 가량이었다. 가족을 포함하면 5만명이 군인 관련 인구로 분류된다.

천인은 노비(奴婢)와 기생, 백정, 재인(才人·광대), 공장(工匠), 승려, 무당, 상여꾼 등 8종의 부류가 해당된다. 천인 중에서 노비가 숫자는 물론 종류도 많아 천인은 통상 노비를 가리키는 말로 통했다. 관청 소유의 노비는 공노비, 개인이 소유한 노비는 사노비라 했다. <북부장호적>에 따르면, 공노비는 한성부에 소속된 부노비(府奴婢)와 궁궐의 궁노비, 내노비, 관청의 서노비(署奴婢) 등이 존재한다.

노비 소유 목적은 노동력 착취...늙고 병들어야 비로소 해방
상전과 노비(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서울의 공노비 수가 모자라면 지방의 공노비를 서울로 불러올려 노역을 시켰다. 이들의 서울 생활 혹독했다. <세종실록> 1423년(세종 5) 5월 28일 기사는 “(노비들이) 잡혀서 서울에 올 때 스스로 지고 온 쌀은 두어 말에 불과하고, 서울에 들어오는 날 돌아가 쉴 데도 없다. 혹 관아 건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비바람을 면하지 못하고 깔 자리도 없으며, 밥을 지어 먹기도 어렵다. 열흘쯤 되면 지고 온 식량도 다 떨어져 춥고 배고프니 부득불 도망하게 된다”고 했다. 서울 각사노비는 궁궐과 각 관사에 소속돼 잡역에 종사했고 관원이 외출할 때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기도 했다.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총 161개 기관에 3629명이 배정됐다.

사노비는 <북부장호적>에서 가내노비인 솔거노비, 외거노비인 가직(家直), 정자직(亭子直), 고직(庫直), 농막직(農幕直), 행랑(行廊), 모입(募入) 노비 등이 발견된다. 외거노비들은 상전과 따로 살면서 주인이 서울에 소유하는 정자, 창고, 농막 등 여러 용도의 건물을 관리하는 노비로 보인다. 외거노비들은 독립된 생활을 하는 조건으로 몸값인 신공(身貢)을 내기도 했다.

노비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을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연령군 소유 준호구(准戶口·호적증명서)>에 의하면, 연령군(1699~1719·영조의 이복동생)에 예속된 서울 중 사환노비는 24명(남자 16명, 여자 8명)이다. 연령분포는 30대가 46%로 절반가량 됐고, 20대, 40대, 50대는 17~21%로 비슷했다. 사환노비는 주인집 내에서 거주하며 노동에 동원됐던 노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10대 이하와 60대 이상의 노비가 없다는 점이다.

영조 노비세습제 개혁...갑오개혁때 비인간적 노비제 폐지
백정 가족(일제강점기). 백정은 팔천(八賤) 중 하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다시 <북부장호적>을 보면, 합장리계(합정동)와 망원정계 등에 거주하는 70대 6명, 60대 3명의 어부는 사노출신이었다. 유학 신감의 사노였던 합장리계의 이춘양은 목수를 생업으로 삼았다. 여성 중 4명은 거지로 표기됐다.

노비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연령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인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이후 어부, 목공, 허드렛일 등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여성 4명은 나이가 들어 상전에게서 독립했지만 남편이 사망해 스스로 생계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구걸로 연명한 사례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은 부친이 참판이었지만 어머니가 기생이어서 출생과 동시에 천민으로 신분이 결정됐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제는 초기부터 부모 중 한명이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원칙을 유지했다. 그러나 국가 입장에서 노비의 증가는 양역(良役·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 인구가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조(재위 1724~1776)가 사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억누르고 노비세습제를 대대적으로 손질한다. 1731년(영조 7) 모계를 따라 자식의 신분을 결정하는 ‘종모제(從母制)’을 법제화한 것이다. 어미만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될 수 있게 한 한국 노비제도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비인간적인 노비제의 완전한 폐지는 그러고서도 160여년의 세월이 흐른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뤄진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반계수록(유형원). 성호사설(이익). 홍재전서(정조)

2. 조선시대 서울의 사회변화.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3. 조선시대 서울의 사족연구. 최진옥. 조선시대사학보(제6권). 조선시대사학회. 1998

4.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 고동환. 태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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