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간부 면직에 외교부 ‘착잡’…만성 인력부족의 그늘
"국장님이 쓰러지고 일주일쯤 후에 제가 메일을 보냈어요. '빨리 일어나셔서 답장 해주세요'라고.
그땐 늦게라도 답장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외교부 과장 A씨)
안경을 쓰고 미소짓는 사진 속 인물은 김은영 전 외교부 남아시아태평양국장입니다.
그는 2018년 11월 16일 아침 싱가포르 숙소에서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아세안 정상회의 수행을 마치고 APEC 회의가 열리는 파푸아뉴기니로 이동해야 했던 날이었습니다. 현지에서 응급수술을 받은 김 전 국장은 사흘 만인 11월 19일 에어 앰뷸런스로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의식은 되찾았지만 후유증이 남아, 의사표시가 어려웠습니다.
기약없는 휴직이 시작됐습니다. 여성 외교관으로는 처음으로 특정 권역을 총괄하는 지역국 국장에 임명된 지 불과 8개월 만이었습니다.
■질병 휴직 5년 만료…면직 불가피
기적같은 호전은 없었습니다. 3년 휴직 이후 2년을 더 쉬었습니다. 국가공무원법상 질병 휴직은 최대 5년까지, 그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퇴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김 전 국장의 휴직은 올해 1월 만료됐습니다.
외교부는 그가 다시 일터에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습니다. 우선 복직을 했다가 다시 휴직하거나 명예 퇴직을 하는 방법도 검토됐습니다. 그러려면 김 전 국장이 복직이나 명퇴 의사를 스스로 밝혀야 하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힘든 상황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김 전 국장은 이달 2일 병상에서 외교부를 떠났습니다. 면직되더라도 연금과 간병비 일부는 지원됩니다. 총액을 비교하면 김 전 국장이 지원받는 금액은 휴직 당시와 크게 차이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급여가 지급되는 질병 휴직 기간과 달리 이제는 '무직'이기에 경제적 부담은 늘어날 거로 보입니다. 외교부는 김 전 국장의 치료비·간병비 지원을 위해 2주간 성금을 모금했으며 국내외 직원들이 이에 동참했다고 밝혔습니다.
■착잡한 외교부…"34개국 총괄, 업무 과중했다"
1994년 외시 28회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 전 국장은 업무처리가 철저하면서도 동료를 잘 챙겼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외교부 과장 A씨는 김 전 국장이 "일 잘 하는 선배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앞뒤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주던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또다른 과장 B씨는 김 전 국장이 "굉장히 명석하고 책임감이 강했다"며 "업무에 관해선 매우 엄격하면서도 후배들의 개인 삶을 늘 걱정해주던 분이었는데 국장의 업무 과중을 이기지 못했던 것 같다.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국장은 당시 동남아와 인도·네팔·아프간 등 서남아시아, 호주·뉴질랜드·피지 등 태평양 섬나라까지 34개국을 관할했습니다. 동남아 국가 연합인 아세안, 이들이 주도하는 협력체도 함께 담당했습니다. (2019년부터는 해당 국가들을 2개 국이 나누어 맡도록 조직이 바뀌었습니다)
B씨는 "아세안 11개국도 국장 1명으로는 벅차다"며 "당시 한달 내내 각종 고위급 교류 등 행사가 끊이지 않았고 휴가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야근이 일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김 전 국장과 함께 일했던 외교관 C씨도 "2018년은 '신남방정책' 추진으로 아세안 국가들과 관계가 강화될 때였고 유달리 업무도 몰렸었다. 정말 정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직원 업무를 총괄하는 동시에 담당 국가와의 정상·장관회담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하는 지역국장으로선 과로를 피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한국은 만성 인력난…일본, 외교관 20% 늘리며 '외교전쟁' 대비
인력부족은 물론 외교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본부 간부인 외교관 D씨는 "다른 부처도 사정은 똑같다"고 했습니다. 부처 증원은 우선 기획재정부 승인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합니다. 일단 이 과정이 워낙 까다로운데다 윤석열 정부가 공무원 축소를 예고하며 증원은 말도 꺼내기 어려워졌습니다. D씨는 "어느 한 곳만 늘려줄 수 없으니까, 증원을 심사하는 기재부조차도 자신들의 인력계부족을 해결 못 하고 버티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국제 정세가 "결정적인 10년의 초입"(2022년 미국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 들어섰다고 할 정도로 예민하고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최근 2~3년 사이 정부 정책에서 외교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이 확대되고, 사이버·첨단과학기술 등 신흥 분야에서도 외교 무대가 차려졌습니다. 할 일이 늘어나니 사람이 더 필요한데 지금은 기존 인력에 일을 더 맡기는 임시방편으로 버티는 듯 보입니다.
일례로 외교부는 5월 정보수집과 분석 역량을 강화한다며 '외교전략정보본부'를 신설했지만 인력 충원을 하지 못해 결국 기존 직원들을 재배치하는 식으로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그 여파로 한반도 업무 담당 부서는 축소됐습니다. 당장은 북한과의 교류가 없더라도 정세가 급변하면 충분하게 대응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일본 사정은 좀 다릅니다. 현재 일본 외무성 정원은 6,600여 명으로 한국의 2.3배입니다.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딱 그만큼 많으니 외교관 수도 그에 비례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국제사회에서의 국력이 2배 차이난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선 한국 외교자원 부족을 엄살로만 볼 수도 없는 듯합니다. (최근 2년간 국회도서관과 미국 조사기관 모두 일본보다 한국의 국력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일본 외무성도 한국 외교부와 조직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일례로 한국 외교부에는 중동·아프리카국(68개국 관할), 유럽국(50개국), 일본·서남아·태평양 담당 국장(25개국) 등 수십개 국가를 담당하는 지역국이 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소속 직원 규모는 3~4배 차이난다고 합니다.
현직 대사 E씨는 "일본 과장이 한국 국장과 비슷한 규모의 직원을 데리고 일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상주 인력을 보내지 못하는 국가와 국제기구에도 일본은 대사를 따로 파견하고 상대를 오래 관리해왔습니다.
일본은 이마저도 부족하다고 보고 2030년까지 외교관을 8,000명으로 늘릴 예정입니다. 일본 외무성은 주요 7개국(G7) 회원국인 독일과 프랑스 수준으로 외교자원을 늘릴 예정이라고 지난해 발표했습니다. 집권 자민당이 미중경쟁을 비롯한 대외환경 대응을 위해 지난해 4월 외교관 증원을 제언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특히 특정 지역을 오래 담당하는 전문가를 집중 채용하겠다는 계획입니다.
한국에선 외교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큰 호응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외교부는 한국의 대외적 '얼굴'이지만 정부 부처에서도 특히 좋은 소리 못 듣는 곳입니다. 외교정책이 정권에 따라 급격히 바뀌면서 이를 집행하는 외교부 역시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국내정치 도구로 활용된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협상과 중재(또는 타협)에 익숙한 외교 관행이 국민 눈높이와 동떨어진 결과를 낳는 경우도, 주변국에 비해 전문성과 장기전략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수적 열세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자는 관행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의문입니다. 호주의 대표 싱크탱크인 로위연구소(Lowy institute)는 2월 각국 외교력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하며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각국 정부가 국력을 과시하고 자국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 자원에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터키의 재외공관 수는 1년 사이에 일본과 프랑스를 제쳤으며, 인도도 외교 인력을 늘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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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기자 (new@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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