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9바우트’ 역전패로 은메달이지만 사상 최고 성적… ‘세대교체’ 성공한 여자 사브르 대표팀의 미래는 더 밝다
전하영의 상대는 우크라이나의 ‘국민 검객’ 올가 하를란. 이번 올림픽 개인전에서도 최세빈을 누르고 동메달을 따낸 하를란의 관록은 무서웠다. 하를란은 전하영에게 단 2점만을 내주며 무려 8점을 따내며 우크라이나의 45-42 승리를 ‘하드캐리’했다. 하를란은 14-20으로 뒤지고 있던 5바우트에서 최세빈을 상대로 9-5로 압도하며 다시 경기 양상을 접전으로 끌고간 선수였다. 이날 1바우트, 5바우트, 9바우트에 나선 하를란은 22점을 득점했고, 단 10점을 내줬다. 득실마진 +12. 사실상 하를란 한 명에 의해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올림픽에서 펜싱 대표팀 내에서 단체전에 출전한 것은 남녀 사브르와 여자 에페였다. 남자 사브르와 여자 에페는 2020 도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한 데다 세계랭킹도 1,2위라서 이번 올림픽에서도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반면 여자 사브르는 팀 세계랭킹 4위였지만, 주목도가 떨어졌다. 게다가 여자 사브르 대표팀은 도쿄 대회 이후 세대교체기를 겪으며 큰 대회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이 대부분이라 그에 따른 의문 부호도 있었다. 2020 도쿄에선 27세였음에도 막내였던 윤지수가 이번 대회에선 맏언니가 됐다. 윤지수를 제외하면 전하영과 최세빈, 전은혜 모두 첫 올림픽이었다.
프랑스전 승리에는 맏언니인 윤지수의 양보도 있었다. 프랑스 선수들과 많이 맞붙어봤던 윤지수는 상대 선수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준결승 6바우트부터 ‘조커’로 남아있던 전은혜에게 피스트를 양보했다. 선수 시절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활약한 윤학길 KBO 재능기부위원의 딸로도 유명한 윤지수는 패기 넘치는 동생들을 뒷받침하며 여자 사브르의 새 역사를 합작해냈다.
개인전 16강에서 세계랭킹 1위 에무라 미사키(일본)를 격파하는 이변으로 존재감을 각인한 최세빈도 개인전에서 대표팀 내 최고 성적인 4위에 오르며 4년 뒤를 기대하게 했다. 후보 선수였던 전은혜도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 6라운드 윤지수 대신 '조커'로 투입돼 빠른 발을 활용한 공격을 앞세워 2경기를 책임졌고, 결승에선 4바우트에서 5-1 승리를 거두며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뽐냈다.
시상식을 마치고 믹스트존에 들어선 여자 사브르 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에는 은메달을 따낸 기쁨과 금메달을 놓친 아쉬움을 공존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씩씩하게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에 대한 자부심과 서로에 대한 칭찬과 배려로 인터뷰에 임했다.
맏언니 윤지수는 “일단 한국 여자 사브르 최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후배들과 함께 은메달을 함께 딸 수 있어 영광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번 올림픽에선 후배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윤지수에게 ‘다음 올림픽 도전은?’이라고 묻자 그는 “이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아버지인 윤학길 위원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말에 윤지수는 해맑게 “아빠, 나 벌써 메달 2개 땄어!”라고 전했다.
9바우트에서 통한의 역전을 허용한 전하영은 “제가 마무리를 잘 못해서 조금 아쉽지만, 언니들과 메달을 따서 너무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힌 뒤 “9바우트가 부담이 되는 자리지만, 침착하려규 했는데, 올가 선수가 경험많은 베테랑이다 보니 제가 밀렸던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 “올림픽 피스트에 올라간 이상 실력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마인드 멘탈적인 부분을 더 배우고 성장해 4년 뒤에는 금메달을 따고 싶다. 이번 올림픽에서 ‘나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배웠다”라고 덧붙였다.
최세빈은 한국 사브르가 강한 이유에 대해 “한국인의 의지 같다. 남자 사브르 대표팀의 박상원 선수가 동갑내기 친구인데, ‘세빈아, 피스트 위에 올라가서 돌면 된다’고 얘기해주더라. 팀원들에게 ‘다같이 돌면 된대요’라고 말해줬는데, 오늘 정말 다 같이 돈 것 같다.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파리=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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