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차』 제이슨 히켈 “지구적 빈곤과 불평등, 기후 위기는 500년 자본주의의 결과” [김용출의 한권의책]

김용출 2024. 8. 4.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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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과학 진보와 산업 발전의 혜택이 저개발 지역의 성장과 향상에 쓰일 수 있도록 새롭게 대담한 프로그램에 착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화, 풍요, 자유를 달성하기 위한 전 세계의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29쪽)

1949년 1월20일, 재선에 성공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된 취임 연설에서 유엔과 마셜 플랜에 대한 지지와 함께 개발도상국 등을 겨냥한 글로벌 경제의 개발 및 발전 논리를 설파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없었지만,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해온 언론은 환호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초상
이 논리는 머지않아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많은 식민지를 잃은 영국과 프랑스에도 받아들여졌고, 이들 역시 식민지와 개발도상국에 대한 개발 발전 논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성공 내러티브인 개발 발전의 논리는 이들의 과거 제국주의적 행태나 이로 인해 가속화된 글로벌 불평등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했고, 앞으로 움직일 방향성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개발과 발전 논리는 이후 책 『경제성장의 단계』를 펴낸 미국 경제학자 월트 로스트 등에 의해 이론화도 모색됐다. 하지만 이 같은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주장은 결코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전 세계 인구의 60%가 넘는 약 43억 명이 인간의 역량이 훼손될 정도의 빈곤 속에서 불안정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1981년에 비해 ‘빈곤 인구’는 10억 명이 늘어났다. 하루 생활비 10달러를 기준으로 할 경우 ‘빈곤 인구’는 51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약 80%를 달한다.
불평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 가장 부유한 나라의 1인당 소득은 가장 가난한 나라 1인당 소득의 32배였는데, 2000년에 들어 이 비율은 134배로 더 확대됐다. 패권국 미국과 개도국이 많이 라틴아메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 사이의 격차는 1960년부터 지금까지 약 3배가 증가했다.

개인 수준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했다. 2014년 옥스팜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5명이 가진 부가 하위 절반인 36억 명이 가진 부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2017년 옥스팜 발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부는 하위 인구 절반인 38억 명이 소유한 부를 합친 것보다 많아졌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 1500년대, 유럽과 나머지 지역들 사이에 소득과 생활수준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아니 여러 측면에서 중국과 인도,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유럽인들보다 더 잘 살았다. 예를 들면, 1800년에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기대수명이 각각 32~34세, 28~30세인 반면, 중국과 일본의 기대수명은 각각 35~40세, 41~45세로 더 길었다. 아즈텍과 마야 문명 사람들의 기대수명 역시 유럽인들보다 크게 낮지 않았다.

이후 몇 세기만에 이들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더구나 극심한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를 초래하면서 오늘날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에 직면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의 빈곤과 극단적 불평등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한쪽은 떠오르고 한쪽은 가라앉게 되었을까. 왜 빈곤과 불평등은 왜 계속해 악화되었을까. 글로벌 빈곤과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엔 「인간개발보고서」 통계자문위원과 유럽 그린뉴딜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경제인류학자인 저자는 책 『격차』(김승진 옮김, 아를)에서 지구적인 빈곤과 불평등은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겨우 500년 전에 서구 유럽에서 생겨나서 세계를 지배 중인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가 일으킨 결과라고 주장한다. 국제적인 빈곤과 불평등은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나라가 각각 가지고 있는 내부적 특성이나 책임의 문제라기보다는 두 지역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돼 있는가의 문제이고, 결국 이 격차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역설한다.

저자는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좋은 소식 내러티브’ 이면에 감추어진 더 큰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라는 프리즘을 가져와 빈곤과 불평등, 기후 위기의 기원 속에는 은밀하게 작동해온 자본주의 체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책에 따르면, 자본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사회적 진보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극대화하고 축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경제의 한계 안에서 자본 축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자신을 더 팽창하기 위해서 ‘외부’를 필요로 한다.
학대받는 흑인 노예를 그린 그림
15세기, 서구 열강들은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마음대로 가져다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피해를 외부화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이들 열강들은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머지않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 남반구 상당 지역을 차지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금과 은을 비롯해 수많은 자원을 추출하고, 아프리카 지역에선 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신대륙에 투입했다. 나중에는 신대륙에서 생산한 설탕과 목화, 식민화된 인도에서 나온 곡물, 식민화된 아프리카에서 나온 천연자원이 유럽의 경제를 떠받쳤다. 또 라틴아메리카의 산에서 캐낸 금과 은을 지불하고 토지집약적인 산품들을 동양에서 구매해옴으로써 자신들의 노동력을 농업에서 산업 쪽으로 옮길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와 함께 불평등한 ‘세계 체제’를 형성한 것이다.

“유럽이 초창기 식민주의 시기에 얻은 실제 이득은 직접적인 추출과 직접적인 부의 축적만은 아니었다. 유럽은 여기에 더해 ‘생태적 횡재’를 얻어서 자국 경제의 방향을 산업적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또한 포획된 시장이 유럽 제조품을 판매할 공간이 되어준 것도 축적의 주요 요소였다.”(115쪽)

이 과정에서 식민지나 개발도상국에 남긴 영향을 파괴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행된 약탈과 폭력으로 7000만 명의 원주민이 숨졌다.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기근으로 3000만 명이 숨졌다. 식민주의 시기 이전에 영국과 비슷했던 인도와 중국의 평균 생활수준은 곤두박질쳤다. 인도와 중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5%에서 10%로 급감했다. 반면, 그 기간 유럽이 차지하는 몫은 3배가 되었다.

그럼에도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친 뒤 20세기 중반이 되자 남반구 국가들은 독립을 이루고 자신들의 경제정책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서구 선진국들은 이들의 성장이 달갑지 않았다. 이전까지 손쉽게 가져다 쓰던 노동, 자원, 시장 접근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이에 원조와 차관, 쿠데타 등을 통해서 서구에 유리하도록 경제 정책을 되돌렸다. 한국이나 필리핀, 그리스 등 안보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원조 및 차관 정책을 실시했다. 이란과 브라질,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가나, 콩고 등 자원이 중요했던 나라들에선 쿠데타와 강제력을 동원해 서구에 유리한 체제와 정책을 추구했다.
인도의 빈민
특히 1980년대 이후 차관과 빚을 빌미로 긴축, 민영화,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가동해 개도국의 경제와 산업을 선진국의 입맛에 맞게 재조정했다.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이용해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성과를 훼손하고 서구가 그곳의 자원과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탄탄하게 구축해 나갔다.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설립해 이를 더욱 용이하도록 했다.

결국 현재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의 80%와 노동의 90%를 남반구 지역이 제공하고 있지만, 부의 대부분은 서구 열강이 차지하고 있다. 남반구 주민들에게 좋은 주거의 영양가 있는 음식, 의료를 제공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역량이 중심부 기업과 주민들의 위해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해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잘 사는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이 잘사는 나라들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부유한 나라의 부와 권력은 지난 수백 년간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추출과 수탈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기존 세계사의 사고가 극적으로 전복되는 순간이다.

저자는 빈곤과 불평등 구조를 타파하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경제모델, 시스템을 채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몇 가지 정책적 대안을 제안한다. 채무국에 대한 부채 부담 탕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의 민주화, 교역 시스템 공정한 개혁, 노동력을 찾아 전 세계를 훑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글로벌 최저 임금제 도입, 간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주는 보편 기본소득 도입,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기후 행동 가속화. 그러면서 토마 상카라의 말을 인용해 인류가 글로벌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선 더욱 과감하게 상상하고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느 정도 미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광기는 순응하지 않을 용기, 옛 공식에 등을 돌릴 용기, 미래를 발명할 용기에서 나옵니다.”(361쪽)

글로벌 경제의 개발 및 발전이라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전복하려는 책은 거시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수치, 역사적인 추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 시절 깜짝 놀라면서 읽던 책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올 지도. 극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이를 맛깔스런 문장으로 풀어내는 솜씨도 눈부시다. 원제는 The Divide.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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