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시들어 죽은 편백, 봉산 힐링 숲 '자연의 경고' [하상윤의 멈칫]

하상윤 2024. 8. 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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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다한 편백은 녹색에서 갈색으로, 다시 갈색에서 적색으로 변해간다. 그러곤 흙빛으로 색이 바래며 사그라든다. 잘린 채 숲 한쪽 구석에 누운 편백 고사목을 360도 카메라에 담았다. 하상윤 기자

지난 6월 서울 은평구 ‘봉산’의 생태를 조명한 기사(본보 6월 8일 자 14면)가 보도된 지 두 달여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기록적인 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다녀갔고, 곧이어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 달 만에 봉산을 다시 찾은 건 낯선 땅에서 낯선 기후를 맞이하고 있을 ‘이민자 나무’ 편백의 안위가 우려됐기 때문이다. ‘서울에 무슨 편백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서울 북서쪽 봉산엔 분명히 편백이 산다. 2014년부터 은평구가 ‘서울시 최초’ 타이틀을 걸고 진행 중인 ‘봉산 편백나무 치유의 숲(힐링 숲)’ 조성 사업 덕분이다. 이 사업은 기존 산림을 베어낸 자리에 편백나무 숲을 조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은평구는 지난 10년 동안 봉산 내 6.5㏊ 규모 산지에 약 1만3,400그루의 편백나무를 심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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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60617050002291)
2014~2016년에 식재된 편백이 붉게 변해 죽은 채 그대로 서 있다. 7월 초부터 8월 초까지 매주 현장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고사목이 발견됐다. 초록빛 나무들 사이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이들 고사목은 대개 일주일 이내로 잘려나갔다. 하상윤 기자
기록적인 폭우와 폭염이 잇따르고 있다. 같은 여름일지라도 어떤 존재들에겐 더욱 가혹하게 다가오곤 한다. 봉산의 편백들은 유난히 낯설고 혹독한 서울의 여름을 나고 있다. 색이 붉게 변하며 죽어간 편백이 뎅강 잘린 채 풀숲에 누워 있다. 하상윤 기자
버려진 고사목 주변을 살펴보면 멀지 않은 위치에서 그루터기가 발견된다. 2014~2015년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체들이다. 하상윤 기자

지난 7월 11일 신사2동 방면 등산로를 오르는 동안 붉게 변한 개체들이 높은 빈도로 눈에 띄었다. 항시 푸르른 상록침엽수인 편백은 잎과 줄기의 색상을 통해 생육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선 채로 붉게 시들어 죽은 나무, 고사 이후 밑동이 잘려 풀숲에 누운 나무, 적갈색을 띠며 붉게 변하기 시작한 나무가 즐비했다. 이미 죽었거나 곧 죽게 될 편백이 10주에 달했다. 죽은 개체들 대부분은 가지 끝에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마지막까지도 생식생장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본지는 지난 기사를 통해 이처럼 생식생장을 보이는 어린나무들의 열악한 생육 상태를 보고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해당 기사에 이미지로 등장했던 개체는 7월 초순에 고사해 중순께 베였다.

왼쪽 사진은 지난 6월 5일 촬영한 봉산 동쪽 사면 편백의 가지 모습. 어린 나무이지만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이 개체의 상태를 확인한 엄태원 숲복원생태연구소장은 "나무가 '나 여기서 못살겠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했다. 오른쪽 사진은 지난 7월 15일 촬영한 모습. 공교롭게 해당 개체는 한달 만에 고사했고 현재는 잘려나간 상태다. 하상윤 기자

현장 동행했던 엄태원 숲복원생태연구소장은 짧은 기간 한 지역에서 여러 편백이 고사한 것을 두고 “나무가 죽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지만, 해당 지역은 토심이 얕아 수분 저장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한여름 무더위가 찾아오면 지상부 수분 손실이 급격히 치솟는데, 이때 나무가 토양으로부터 수분을 충분히 조달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존 숲에 뿌리내리고 살다 편백림(꽃잔디 동산)을 조성하며 잘린 나무들 중 소나무가 많았던 건 그들이 건조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는 종이기 때문이다”라고 부연했다.

왼쪽 사진은 2014~2015년경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산 편백의 가장자리 모습으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며 생식생장이 도드라져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전남 장성군 국립장성숲체원에서 촬영한 비슷한 나이대의 편백 개체.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참고 목적으로 병치했다. 임은재 인턴기자·장성=하상윤 기자

죽은 편백이 연달아 발견되고 있는 사면 바로 옆 급경사지에 자리한 ‘꽃잔디 동산’에는 폭우 이후 표토가 흘러내리며 곳곳에 잘린 소나무 뿌리와 돌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현장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편백나무 식재를 목적으로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숲을 개벌했으나, 암반 지대임이 뒤늦게 밝혀지며 편백나무를 심는 데 실패하고 대신 꽃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봉산 숭실고 방면 급경사지에 조성된 ‘꽃잔디 동산’ 가장자리에 벌목된 나무의 뿌리와 암반부가 나출돼 있다. 현장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편백나무 식재를 목적으로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숲을 밀어냈으나, 암반 지대임이 뒤늦게 밝혀지며 편백나무를 심는 데 실패하고 대신 꽃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하상윤 기자
숲이 사라진 공백을 꽃잔디가 메우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집중 호우 뒤 드러난 꽃잔디 아래 암반. 하상윤 기자

40년 가까이 봉산을 오르내린 지역 주민 이연숙(75)씨는 당시 벌목 현장을 목격했던 일을 회상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30년 넘게 봐왔던 소나무를 하루 아침에 다 잘라놓은 걸 보고 속상해서 항의했더니 현장 관계자가 ‘편백 심는 자리에 소나무가 있으면 되겠냐?’고 되물었다. 더욱 황당한 건 그렇게 좋았던 나무를 다 베고서 그 자리에 엉뚱한 꽃잔디를 심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에 다시금 따져 물었더니 ‘돌바닥이라 편백을 심을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고, 위에서 시키는 일이라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이씨는 이곳 꽃잔디의 활착률이 90%가 넘는다는 은평구청 해명에 대해서도 “초창기 심은 꽃잔디가 제대로 못 살고 많이 죽었다”면서 “사람들이 새로 심는 걸 수시로 목격했다”고 밝혔다.

편백숲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있던 숲을 개벌하고 이때 자른 '불량 나무'를 깎아 가짜 동물로 만들어 세웠다. 이들은 원래 이곳에 있던 숲을 삶터 삼았던 동물들을 대신한다.

지난 7월 29일 오후께 찾은 봉산에서는 엔진음이 진동하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따라간 자리에서 예초기를 든 구청 관계자들을 마주했다. 그들은 봉산 전망대 아래에 마련된 신규 편백 묘목 식재 지역(2023년 조림)에서 새로이 돋아난 ‘잡초’들을 모조리 깎아내고 있었다. 편백을 제외한 모든 식물종은 잘리고 으깨져 바닥에 두껍게 깔렸다.

지난 7월 29일 봉산 전망대 아래 신규 편백 묘목 식재 지역에서 마주친 구청 관계자들. 예초기를 들어 '숲 가꾸기'에 한창이다. 하상윤 기자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은 산을 모조리 밀고 단일 수종 중심으로 숲을 구성하는 것을 두고 “숲이라는 건 다양성이 우선된 공간이기에, 단일 재배종을 기르는 ‘밭(농경)’과 대척점에 있다”면서 “‘숲 가꾸기’를 명목으로 기후에 맞지도 않는 종을 인간이 개입해 농사짓듯 단일화해 기르는 건 대단히 모순적이며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29일 봉산 전망대 아래 편백 묘목 식재 지역에서 구청 관계자들이 예초기를 돌리며 '숲 가꾸기' 작업을 하고 있다. 가운데 지지대로 고정된 나무가 2023년 심어진 편백 묘목이다. 하상윤 기자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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