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고 애타는 마음, 읽고 챙겨준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이다의 도시관찰일기]
키 큰 메타세쿼이아의 부러진 가지에 열쇠가 걸려있다. 딱 내 키 높이다. 평범한 은색 열쇠인데 방 열쇠보다는 크고 대문 열쇠보다는 작은 느낌이다. 여기는 초등학교 담장 바로 옆. 주변을 둘러봐도 이 열쇠로 열 만한 문은 없다. 청소도구함 같은 것이 있나 봤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느 초등학생이 자기 집 열쇠를 학교에 올 때 여기 걸어놓고, 집에 갈 때 다시 가져가는 걸까? 이런저런 상상을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무에 걸린 열쇠 사건’은 7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은평구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슷한 풍경을 봤다. 전봇대 핀에 CD가 걸려있었다. ‘초통령’으로 불리는 아이브(IVE)의 CD였다. 아니, 요즘은 홍보를 이렇게 하나? 발을 들고 간신히 CD를 빼서 보니 뒷면이 잔뜩 긁혀 있다. 요즘 아이돌 ‘덕후’들은 포토카드 때문에 CD를 몇십 장씩 산다던데, 너무 많아서 토템으로 걸어둔 건가? 한참 생각하고는 다시 제자리에 걸어두었다.
그러다 며칠 후 이번엔 전봇대에 둘러놓은 홍보물 윗부분에 야무지게 끼워놓은 신용카드를 봤다.
아…! 그제야 실마리를 찾았다. 이상한 장소에 이상하게 존재하던 열쇠, 아이브 CD, 신용카드의 공통점을 알 것 같았다. 그것들은 모두 누군가가 잃어버린 물건이 아닐까? 지나가던 사람이 그 분실물을 발견해 그 자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걸어놓은 것이다.
이후부터 다른 것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마트의 당근 코너에 빨간색 뿔테 안경이 올려져 있는 것을 봤다. 옛날 같으면 물음표를 머리 위에 10개쯤 띄운 상태로 ‘누가 여기서 미술 프로젝트 중인가? 새로운 미술의 형태인 건가?’ 했을 거다. 이제는 안다. 누군가 잃어버린 안경을 다른 누군가가 발견하고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둔 것이다. 빨간 뿔테의 주인은 왜 당근 코너에서 안경을 잃어버린 걸까? 노안 때문에 안경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뭔가를 보다가, 떨어뜨렸을까?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물건을 잃어버린다. 분실물센터에는 주인 잃은 물건들이 넘쳐난다. 관공서 앞 우산꽂이에는 찾아가지 않은 우산들이 가득하다.
밖에 나가면 바닥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과 종종 마주친다. 심지어 나 같은 경우는 집 안에서도 물건을 잃어버린다. (집 안에서 전기모기채를 잃어버린 사람을 보셨나요? 그게 접니다) 산책로에서는 가끔 붓글씨로 쓴 절절한 호소문도 보인다. “이틀 전, 휴대전화기를 이곳에서 분실하였읍니다. 검정색 삼성 폴더폰입니다. 소중한 사진이 들어있으니 발견하신 님께서는 아래의 전화로 연락하여주시면 사례하겠읍니다. 사례금 10만원.”
사실 모른 척해도 상관없다. 누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찾거나 솔직히 나와 관계있는 일은 아니다. 되레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갑을 일부러 흘려놓고 지갑을 집으면 훔쳤다며 합의금을 요구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남의 잃어버린 물건을 줍거나 주인을 찾아주는 것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쾌히 그렇게 한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사람은 이 물건이 없으면 불편할 것이고, 반드시 찾으러 올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물건을 곱게 놔둔다. 누가 찾으러 오나 옆에서 지키고 서 있지도 않고, 자기 계좌번호를 남기지도 않는다.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인류애적인 행동이다. 공감 능력,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지능, 현재 상황을 추정해 미래를 예측하는 사고력 그리고 이타심이 합쳐져야 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가져가거나 함부로 버리지 않아야만, 도시관찰자인 내가 그 분실물을 목격할 수 있다. 온 사회가 함께 만들어내는 고도의 사회화된 행동이다.
버스에 깜빡 두고 내린 ‘성심당 빵’ 4만원어치
혹시나 싶어 회차하는 버스 탔더니 기사님이 건넨 빵 봉투
날아갈 듯 기쁜 마음과 함께 깨닫는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구나’
누군가의 ‘분실물’ 눈에 띄기만 해봐라, 꼭 주인 찾아주리라
나에게도 과연 이런 일이 생길까? 궁금한 마음에 물건을 잃어버리는 실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장갑 같은 것을 남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길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과연 내 분실물도 근처에 고이 장식될 것인가? 하지만 말이 쉽지, 멀쩡한 물건을 일부러 잃어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방 출장을 다녀오며 대전역에 들러 성심당에서 빵을 샀다. 하나둘 집다 보니 어느새 산더미같이 사버렸다. 두 개의 쇼핑백에 든 빵을 하나로 합치고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단단히 묶었다. 바게트가 위로 약간 튀어나왔지만 괜찮다. 쇼핑백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성심당’ 로고를 보자 마음이 뿌듯해졌다.
소중한 빵 봉투를 애지중지 모시고 서울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을 타고 와 집 근처 역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짐도 많은데 저상버스라니 행운이다. 맨 뒷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렸다. 이제 집에 가서 빵을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에 중학생들이 와글와글 밀려든다. 하교 시간과 겹쳤는지 버스가 가득 찼다. 땀이 삐질 났다. “잠깐만요! 내릴게요!” 무거운 가방에 트렁크까지 들고 필사적으로 중학생들을 비집고 나왔다. 그리고 땀을 닦으며 집으로 들어왔는데, “아.”
빵 봉투가 없다. 나의 소중한 성심당 빵 봉투가 없다. 머리가 새하얗다. 어떡하지? 이걸 어디서 잃어버린 거지? 찬찬히 생각해보니 아까 버스 뒷좌석에 탔을 때 옆 좌석에 빵 봉투를 잠시 놔뒀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쓰러질까 봐 눕혀두기까지 했다. 인파를 뚫고 내려야 한다는 데에 집중하다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을 놔두고 내린 것이다. 나의 4만원어치의 빵을!!
자괴감이 밀려온다. 빵을 잃어버리다니… 정말 최악이다. 차라리 가방을 잃어버리는 게 나을 뻔했다.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 가방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빵을 어떻게 다시 찾는단 말인가? 은평구는 언덕이 많다. 벌써 버스 안에서 굴러떨어져 남들에게 지근지근 밟혔을 게 뻔하다. 버스 영업 끝난 밤에 찾으러 가면 더운 날씨에 빵은 이미 다 상한 뒤일 것이다.
“엇!”
번뜩 생각이 났다. 내가 아까 탔던 버스는 연신내에서 회차해 우리 집 건너편 정거장으로 돌아온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총알같이 신발을 신고 뛰쳐나갔다. 지도 앱으로 버스 번호를 검색해보니 버스 노선도 위에 서너 대의 버스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 우리 집을 지나친 지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저상버스가 있었다. ‘혼잡’이라는 알림도 떠 있다. 이거다!
나는 버스정류장에 정좌로 앉아 버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모기가 신나게 다리를 뜯고 있었지만 ‘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해 가려운지도 몰랐다. (누가 알면 금괴라도 잃어버린 줄)
그렇게 20여분이 지나 드디어 버스가 왔다. 멀리서 버스 번호가 보이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타서, 인사하고, 카드 찍고, 아까 탔던 맨 뒷자리로 가서, 재빠르게 빵 봉투를 집고, 없을 시에는 앞 좌석 버스 바닥을 확인한다. 좋아! 가자! 5, 4, 3, 2, 1…!
“삑”
성큼성큼. 버스에 타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뒷좌석만 보고 달려들었다. 제발 있어라, 제발! 그런데 이럴 수가. 없다. 빵 봉투가 없다. 빵도 없고 봉투도 없다. 앞 좌석으로 뛰쳐가 바닥을 본다. 바닥에도 아무것도 없다. 발에 밟힌 빵조차 없다. 누가 이미 집어간 게 분명했다. ‘오버’를 보태서 약간 눈물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내 명란바게트, 튀김소보로, 보문산메아리, 올리브치아바타… 긴장이 풀리며 어깨가 추욱 처졌다. 나는 졌다.
잠깐, 아직 마지막 희망이 남았다. 혹시 모르니 버스 기사님께 여쭤보는 거다. 누가 빵 봉투를 기사님에게 맡겼을 수도 있잖아? 제발!
“기사님, 혹시요, 쇼핑백 하나 잃어버린 거 혹시 분실물이 있으실까요?”
다음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섰다. 휘청거리며 걸어가 말도 안 되는 문법으로 기사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무표정이던 기사님 얼굴에 ‘씨익’ 하는 미소가 떠오른다. 아니, 저 미소는? 나는 저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저 표정은 바로… 상대방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직전, 얼굴에 떠오르는 뿌듯함이다!
“이거요?” 하며 기사님이 빵 봉투를 들어 보였다.
“으악!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해요! 대전에서 사온 거거든요! 완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광분, 극도의 기쁨. 거의 방언 수준이다. 기사님이 웃으며 닫힌 버스 문을 다시 열어줬다. 내리면서 “감사합니다!!!”를 최대 볼륨으로 외쳤다. 버스에 탄 모든 사람이 나를 보며 버스가 지나쳐간다. 그들도 웃고 있는 것 같다(그제야 기사님께 보답으로 빵이라도 하나 드릴 걸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조금 부끄럽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했다. 빵을 되찾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만세! 나는 이겼다. 아니 인간이 이겼다.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이 빵 봉투를 보고 이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난감함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리고 기사님에게 분실물로 전달했다. 내가 빵 봉투를 되찾는 순간, 기사님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남이 빵을 다시 찾든 말든, 빵을 100개를 먹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고 자기 배가 부르지도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나의 기쁨에 동조했다. 그 누구도 빵 하나 나눠 받지 않았는데도 다들 흐뭇해 보였다.
되찾은 빵을 먹으며 전의를 불태운다. 누가 뭐 잃어버리기만 해봐라. 똑같이 돌려줄 테다. 이 기쁨을 분명히 되갚아줄 것이다, 하고.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이다|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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