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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굴욕 안긴 파리 올림픽
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한 하계 올림픽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려 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선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파리 올림픽은 시작부터 각종 논란을 일으키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 중인데요. 개회식에서 국가명을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이라 소개받은 우리나라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올림픽은 여러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이번 올림픽은 우선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 이후 10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열리는 대회입니다. 또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조국인 프랑스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100년 전 이 곳 파리에서 열린 올림픽이 쿠베르탱의 명예 회복을 위해 프랑스가 야심 차게 준비한 행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알기 위해 올림픽의 역사를 살펴봐야겠습니다.
패배감에 절어있던 프랑스 소년의 꿈
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쿠베르탱은 1863년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였던 샤를 쿠베르탱 남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 시대가 막을 내린 뒤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가 7살이던 1870년 터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또다시 유럽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이는 유년기 쿠베르탱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됐습니다.
독일제국 수립을 주도했던 프로이센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던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국력이 약한 이유는 소속 군인들이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를 사랑했던 청년 쿠베르탱은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군인이 되기를 꿈꿨지만 부족한 자신의 역량을 깨닫고 학교를 그만둔 뒤 교육학을 공부합니다.
군인꿈 접은 쿠베르탱, 고대 올림픽에 꽂히다
군인이라는 꿈은 좌절됐지만 이는 오히려 기회가 됩니다. 남성들의 체력을 높이고 운동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하던 그의 눈에 바로 고대 올림픽이 눈에 띈 것입니다. 고대 스파르타식 교육에 대해 흥미를 느낀 그는 특히 고대 올림픽의 부활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처음엔 프랑스를 더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민족주의적 욕구로 시작했던 그의 올림픽에 대한 관심은 점차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고대 올림픽 정신을 되살리고 전 세계 스포츠인들을 위한 축제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는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조직하고 제1회 대회를 1896년 고대 올림픽의 성지, 그리스 아테네서 개최키로 결정합니다.
올림픽의 기원, 스포츠가 아닌 제사?
사실 고대 올림픽은 스포츠 대회라기 보단 제사에 딸린 체육대회라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올림픽이란 어원 자체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성지였던 ‘올림피아’에서 열린 올림피아 제전에서 유래합니다. 즉 올림픽이란 대회명이 바로 그리스의 신성한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곳곳에선 여러 제전이 열려왔습니다.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올림피아 제전인데요.
여러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9세기 또는 기원전 776년부터 이러한 제전이 열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기원 후 393년 그리스를 정복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폐지됐습니다. 1169년간 이어졌던 올림피아 제전의 역사가 마무리된 순간입니다.
실제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던 성지는 지금도 찾아가 볼 수 있는데요. 그리스 서그리스주 엘리스 현에 위치한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유적이 바로 그곳입니다. 고대 올림픽은 그 자체가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 성격이 훨씬 짙습니다. 이곳 올림피아 제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근대 올림픽의 성화 역시 바로 이 곳 제우스 신전에서 채화됩니다. 또한 올림픽 대회때마다 그리스 팀이 가장 먼저 입장하는 이유도 이렇게 올림픽의 기원이 된 올림피아 제전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고향 파리에서 열린 굴욕적인 올림픽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렇게 쿠베르텡은 제1회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냅니다. 다만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인 탓에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바로 1회 대회의 조직위원장이자 그리스 국왕인 요르요스 1세가 앞으로도 계속 올림픽을 그리스에서만 개최하자고 떼를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1900년 대회가 이미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기로 돼 있었고 전 세계적 흥행을 위해서는 도시를 순환하며 개최해야한다는 쿠베르텡의 주장이 결국 관철됐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 치러진 1900년 2회 파리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올림픽이란 불명예를 얻고 맙니다. 당시 올림픽에 대한 인지도가 낮던 때라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파리 엑스포의 부속 행사로 대회가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박람회 측은 올림픽을 관객 동원용 흥밋거리로 치부했고 IOC의 권고와 규정을 무시한 채 낚시 대회, 소방수 경연, 비둘기 사격 등 기상천외한 구경거리로 전락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명예로운 올림픽 대회는 올림픽이라고 불리지도 못한 채 국제경연대회란 이름으로 당시 언론에 보도됐고 사실상 완전히 엉망진창이 대회가 된 것이죠. 사실 이런 사달은 당시 예산이나 준비가 부족했던 IOC가 별도 조직위원회를 꾸리지 못한 채 엑스포 주최 측에서 행사를 주도하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다만 여성이 참여하지 못했던 1회 대회와 달리 여성들이 대거 참여했고, 1등이 은메달, 2등이 동메달이었던 이전과 달리 금, 은, 동메달을 1~3위에게 수여하는 등 여러가지 유의미한 성과도 거두기도 했습니다.
다음 대회인 미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역시 박람회와 함께 열렸지만 워낙 큰 상처를 받은 쿠베르탱 남작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3회 대회는 그나마 선방했습니다. 다만 쿠베르탱에게 2회 대회는 너무나 악몽 같은 대회였습니다.
쿠베르탱 명예회복을 위해 열린 파리 올림픽
그렇게 4년마다 개최되며 점차 참여 규모와 인지도를 키워가던 올림픽. 이제 노년에 접어든 쿠베르탱에게 명예회복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1924년 제8회 대회가 바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게 된 것이죠.
8회 대회는 IOC가 창설된 지 30주년이 된 기념비적인 해이자 쿠베르탱의 명예로운 은퇴를 목표로 의욕적으로 준비됐습니다. 사상 최대인 5대륙 44개국, 2956명이 참여한 가운데 다양한 혁신이 이뤄집니다. 먼저 동계 올림픽이 하계 올림픽과 분리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5개의 원이 엇갈리게 배치된 올림픽 엠블럼 역시 이 대회부터 처음 도입됐습니다. 100년 뒤 열린 이번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선 이 엠블램이 거꾸로 게양되는 사고도 발생했죠.
또한 최초의 흑인 금메달리스트가 나왔고 세계 최초의 라디오 중계가 도입된 것도 1924년 올림픽입니다.
그리고 쿠베르탱은 이 대회를 끝으로 IOC 위원장직에서 명예로운 퇴진을 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193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향년 74세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쿠베르탱의 고향에서 열린 3번째 올림픽
이번 파리올림픽을 개최하며 프랑스 파리는 영국 런던, 미국 LA와 더불어 올림픽을 가장 많이 개최한 도시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을 만든 쿠베르탱이 태어난 고향.
100년 전 파리 올림픽은 쿠베르탱의 명예를 충분히 회복했단 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대회 초반부터 여러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이번 파리 올림픽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