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그리려면 관찰만 1년…낯선 땅의 자생 난초 그리기

한겨레 2024. 8. 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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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식물 그리는 일
미국 메릴랜드 지역에서 자생하는 난초 ‘다우니 래틀스네이크 플랜틴’. 여름에 꽃이 피었다.

예전에 어느 교수님이 미국에 처음 공부하러 와서 금방 미국 식물을 외울 수 있을 것 같아 자신만만했다고 하셨다. 한국 식물과 같은 종으로 보이는 식물이 많아서였다고. 그러나 조금 깊이 들여다보니 한국 종과 미묘하게 다르게 생긴 근연종(발생계통이 가까운 종류)이어서 오히려 구별하기 쉽지 않았단다. 나는 2018 년에 처음 메릴랜드의 숲속을 걸으며 정확하게 그 교수님과 같은 경험을 했다. 첫 1 년 동안 숲속에서 만난 종이 한국 종과 같은 종인지 근연종인지 구별하느라 애를 먹었다. 갑작스레 새로운 종을 많이 접했으니 어려운 게 당연한데 나는 조급하고 힘겨워했다 한국에서 식물 이름을 척척 부르며 나름 자신감 넘쳤던지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처음 보는 식물들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계획도 여럿 세웠지만 1 년이라는 시간 내에 제대로 완성한 건 없었다. 새로운 실험도 열심히 배우긴 했으나 그걸 바탕으로 논문을 쓸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대학에서 여러 생물학 분야를 배웠어도 내가 전공한 식물분류학 분야가 아닌 식물생태학 분야로 갑자기 논문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1 년의 경험은 많은 도전이었지만 내가 식물학자로서 재능이 없다는 암담한 느낌을 남겼다.

식물 그리려면 관찰만 1년

그때 계획했던 일 중 하나는 이곳 메릴랜드 지역의 자생 난초를 그리는 것이었다. 과학적으로 식물을 그리려면 그 종과 관련된 많은 문헌을 조사하고 1 년 동안 생애주기를 관찰해야 한다. 그 이후 그리는 시간도 최소 한 달 넘게 걸리니 사실 1 년 안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려운 실험과 분석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내가 혼자 잘 해왔던 그림은 한 점이라도 완성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못했다. 문헌 조사가 오래 걸린 것도 있지만 나는 식물을 그리려면 어떤 이의 초상화를 그릴 때처럼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익숙해지고, 사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만큼 난초를 충분히 관찰하지 못했기에 그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이곳 연구소에서 3 년째인 올해 드디어 난초를 그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자연스레 난초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되었고 숲속에서 난초와 충분히 함께한 덕이다. 올해 초에 그리고 싶은 종과 그 종의 새싹, 꽃, 열매, 씨앗 등을 볼 수 있는 날짜를 목록으로 만들어 놓치지 않고 하나씩 관찰하고 있다.

7월의 어느 날, ‘다우니 래틀스네이크 플랜틴’( Downy Rattlesnake Plantain, 학명 Goodyera pubescens ) 이라는 난초의 꽃을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이 난초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털이 많고 (downy) 잎에 방울뱀 (rattlesnake) 의 비늘 같은 무늬가 있으며 질경이 (plantain) 처럼 잎이 중앙에서 모여 나 납작하게 사방으로 퍼진다. 식물체가 작고 땅에 납작 붙어있어 찾기 쉬운 편은 아닌데 겨울에도 푸르고 독특한 무늬가 있는 잎을 볼 수 있어 겨울에 더 찾기 쉬운 난초다. 나는 지난겨울에 연구소의 한 늪지 옆에서 이 난초의 잎을 발견하고 계속 관찰하다가 드디어 여름의 한가운데인 이날 꽃 관찰에 성공한 것이다. 겨울에는 난초가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난초를 덮어버린 낙엽을 치워주고 봄부터는 어느 개체에서 꽃대가 올라오는지 계속 살폈다. 일곱 개의 개체 중에서 한 개체의 잎 중앙에 무언가 작은 게 올라왔을 때 얼마나 설렜는지 , 그것이 조금 더 자라서 내가 기다리던 꽃대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또 얼마나 신이 났던지. 꽃대는 생각보다 길게 뻗어 올라갔고 꽃봉오리가 생기고도 한참을 더 자랐다. 다닥다닥 붙어있던 꽃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리를 잡고 봉오리가 벌어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밑에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 그 작은 꽃이 지금 완전히 핀 것인지 아닌지 또 한참 고민했다. 노란 꽃밥이 보이지 않아서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을 땐 혹여 사슴이 꽃을 뜯어 먹을까 밤새 걱정했다. 이곳에 사는 흰꼬리사슴은 이 난초를 곧잘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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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그림이 주는 위로

이런 끈질긴 난초 관찰은 가끔 내가 연구소에서 느끼는 허전함을 채워주곤 한다. 새로운 실험과 분석에 막막함을 느끼고, 제출한 논문이 거절되고, 시도하려는 논문 주제가 어렵게만 느껴질 때 논문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림을 통해 이렇게라도 난초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요즘 나는 종종 나 자신이 게으르고 형편없는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열심이지만 성과가 없는 거 같아서다 . 정확하게는 논문이 아직 출판되지 못했고 논문은 앞으로 안정적인 연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도와주신 선배 식물학자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한 분에겐 죄스러움마저 든다. 최근에 연구를 위한 어떤 펀드를 시도하면서 내 선임연구관님의 지인에게 추천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그 지인분이 흔쾌히 수락하였고 그들의 대화 메일을 전달받게 되었다. 나는 그 메일 속에서 선임연구관님의 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알게 되어 놀랐다. 결국 사무실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다우니 래틀스네이크 플랜틴 을 조사하면서 37 년 동안 이 난초를 관찰한 과학자들의 논문을 읽었다. 흰꼬리사슴의 섭식이 난초의 개체 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했고 흰꼬리사슴이 난초를 많이 먹어 치우면 다음 해에 난초의 개체 수가 감소하고 회복하는 데 몇 년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사실 당연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37 년간의 꾸준한 관찰과 정확한 분석은 두 장의 짧은 논문임에도 강렬한 성실함이 담겨 있었다. 사전에서 ‘ 성실 ’ 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정성스럽고 참됨’ 을 뜻한다. 오늘의 꽃 한 송이 관찰이 앞으로의 논문이고 전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시간이 결과물을 맞이하는 뿌듯한 시간보다 더 길다. 내 고민을 아는 친구가 내게 말했다. “그냥 계속해. 그러다 보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해.”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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