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주어진 9시간…공항 빠져나와 숲으로 [ESC]
제네바 가는 길, 헬싱키 경유
16㎞ 거리 국립공원까지 걷기
낯선 숲 만끽하고 돌아 나와
삶을 바꾸는 것은 대체로 강인한 의지보다 우연한 기회다. 인생 여행에 대해 말할 때 나의 경우 13년 전 히말라야 여행을 꼽지만 모든 역사적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은 비화가 존재하는 법이다. 산과 함께하는 나의 여행을 한 편의 글에 비유할 때 2011년 4월12일, 네팔 가는 길에 사흘간 체류한 방콕 카오산로드는 그 글의 행간이지 않을까 싶다. 당시 나에게 방콕에서의 스톱오버를 권유한 것은 카트만두 비행기 표를 발권해준 여행사 직원이었다. 마침 방콕을 경유하는 시기가 송끄란 기간이니 급하지 않으면 들렀다 가라는 것이었다.
스톱오버, 여정 중 중간기점에서 잠시 머무는 것을 이르는 일종의 비행 용어다. 단기 체류라고도 하며 나라에 따라 비자가 필요한데 태국은 한국인 90일 무비자 조건이다. ‘정화’의 의미가 있는 태국의 물 축제를 즐기는 동안 나는 마치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앞으로 다가올 여행의 본편을 기대할 수 있었고, 점점 당겨지는 시차 속에서 시간은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2023년 8월28일, 나는 헬싱키 반타국제공항 환승 게이트에서 유유히 걸어 나와 핀란드의 낯선 숲을 향하고 있었다.
시내버스 없고 택시 타기는 싫어서
알프스 몽블랑을 보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프랑스 샤모니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스위스 제네바까지의 비행시간은 총 16시간. 헬싱키공항은 중간 기착지였다. 난데없이 때아닌 핀란드에 들르게 된 계기는 여행 기간이 임박해 비행기 표를 발권했기 때문이었다. 고가로 치솟을 대로 치솟은 비행기 표 중에서 우연히 고른 것이 핀란드 국적의 여객기였다. 핀란드라니. 문득 다큐멘터리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봤던 북유럽 특유의 감성이 밀려왔다. 단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몽환적인 숲이었다.
헬싱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제네바로 이동하기까지 나에게는 10시간4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재탑승을 위한 수속 시간 1시간 반 정도를 제외하면 약 9시간. 어디서 무엇을 할까? 일단은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공항 안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에 9시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구글 지도를 켰다. 그리고 현재 위치에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산을 검색했다. 놀랍게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폰코르피 국립공원’이 있었다. 공항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구나.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었다. 공항 1층의 물품 보관소를 찾아 배낭을 맡겼다.
시폰코르피 국립공원은 2011년 3월2일 설립된 핀란드의 국립공원으로, 핀란드에서 가장 큰 헬싱키공항이 위치한 반타에 함께 속해 있었다. 수도 헬싱키의 동북쪽에 있는 반타는 핀란드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위성도시다. 시폰코르피 국립공원은 헬싱키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며 아름다운 숲과 호수, 드넓은 들판을 보유하고 있어 많은 핀란드 사람이 사랑하는 안식처다. 헬싱키공항에서 시폰코르피 국립공원까지의 지도상 거리는 16㎞였다. 주어진 9시간 안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5시59분이었다.
시폰코르피 국립공원까지 바로 가는 시내버스는 없었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곧장 이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밤 좁은 비행기 안에 움츠러져 있던 몸을 펴고 우선 좀 걷고 싶었다. 공항 밖은 미로 같았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길을 헤매며 간신히 공항을 벗어났다. 차가 쌩쌩 달리는 신작로 옆을 걷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마음은 동요했고 곧 비를 쏟아낼 듯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자 돌연 걱정이 됐다. 처음 도착한 나라에서 나는 위축됐다. 그때 내 옆으로 백발의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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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걷고 싶었지만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그곳에 사는 평범한 현지 사람을 만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겁먹지 말라고. 여기도 다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라고.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낯선 곳에서 엄습하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이곳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핀란드도 마찬가지였다. 5㎞쯤 지나 작은 거리에 들어서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 어딘가로 바쁘게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전 7시30분이었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여행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익숙한 일상이다.
조금도 읽을 수 없는 핀란드어로 적힌 교통표지판과 상점의 간판을 보면서 어떤 내용일까 추측했다. 구글 지도가 미처 안내하지 못하는 길 앞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역시 핀란드어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어디로 가면 된다는 정도의 메시지는 표정만 봐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나는 핀란드 사람들은 친절했다. 여기 사람들이 사는 집, 타고 다니는 차, 이용하는 공원 등을 한동안 구경했다. 길가의 나무에는 탐스러운 사과와 앵두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낙과한 것 중 몇 개를 주워 먹었다. 시고 달고 맛있었다.
어느 순간 시내를 빠져나온 것인지 주변에는 정적이 흘렀고 눈앞으로 도시 외곽의 한산한 풍경이 이어졌다. 전원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자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피어나는 하얀 안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정말이지 그림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비경에 취해 걷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시폰코르피 국립공원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문비나무 사이를 걸었다.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누구를 만날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숲을 한참을 걸었다. 야생의 살아 있는 숲이었다. 버섯과 이끼가 도처에 가득했다.
사진으로 본 호수를 발견했다. 날씨 때문에 호수는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근처에 캠핑 사이트가 있었으나 평일인 까닭에 텐트는 한 동도 보이지 않았다. 길은 끝이 없었다. 휴대폰 속 지피에스(GPS)는 현재 좌표를 잃은 지 오래였고 나는 내가 이 숲에 얼마만큼 들어왔는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더 걷고 싶었지만 더 가다가는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주어진 자유 시간 9시간 중 4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전하게 이쯤에서 왔던 길로 돌아 나가야 했다. 아쉬운 마음에 거듭 뒤돌아보는 숲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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