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지젝, '폭력'을 말하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텔레그램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나 가자에서 살해된 희생자들의 사진이 여과없이 올라오고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인류가 다시 전쟁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어느 심리학자는 한국 사회를 '학대사회'라고 진단한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지속적인 폭력을 학대라고 지칭할 때 폭력사회가 더 정확한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런 문명사회를 건설해두고도 어째서 아직도 폭력을 넘어서지 못했을까? 답답한 마음에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 펴냄)을 펼쳤다. 혹시나 세계적 철학자에게는 대안이 마련되어 있진 않을까 해서.
지젝은 책 첫머리부터 폭력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관점을 거부한다. 그는 두가지 폭력이 있음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이다. 지젝은 이런 폭력이 야기하는 흥분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설 것을 요구한다. 주관적 폭력은 폭력의 전부가 아니라 폭력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다. 폭력의 또 다른 측면은 '객관적 폭력'이다. 여기에는 언어를 통해서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 있다. 주관적 폭력이 비폭력을 배경으로 경험되는데 반해 객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해 있는 폭력이다.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폭력만이 아니라 객관적 폭력을 이해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의 경우 작동방식이 교묘하여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가령 폭력과 싸우거나 관용을 장려하는 우리의 노력조차 어떤 유형의 폭력 네트워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젝은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 하다. (중략) 이처럼 사회적 행위자, 사악한 개인, 억압적인 공권력, 광신적 군중이 행하는 폭력 등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에는 어딘지 의심스러운, 사실상 징후적인 구석이 있지 않은가?"(상기책 인용, 인용 미기재시 동일) 폭력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관심이 직접적 폭력에만 있을 경우 구조적 폭력은 더욱 강화되기 마련이다. 지젝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내재한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16세기 멕시코의 비극에서 한 세기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릴 때면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부인된다." 그저 객관적 과정의 결과물로만 여겨진다. 콩고에서 수백만을 살해한 벨기에 레오폴드 2세는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을 벨기에 국민의 복지를 위해 썼다.
지젝은 레오폴드 2세를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선구자였다고 말한다. 지젝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는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등이다. 환경을 생각하고 빈자들의 복지를 걱정하며 좋은 자본주의를 설파하는 이들은 선한 의도로 충만하다. 지젝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는 일반적 의미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에게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란 현실의 구조적 변화없이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이념가'를 의미한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까?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고 더불어 살자는 선한 마음씨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인가? 지젝의 관점으로 보자면 구조적 폭력을 '애써' 외면하는 작은 선의는 진정한 선의가 아니다. 지젝은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알랭 바디우의 말을 인용한다.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고 개선해가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은 대개의 경우 구조적 폭력을 외면한다. 구조적 폭력을 외면하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생각의 배경에는 모두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는 상대주의가 숨어있다. 모두에게 관용을 허락하는 것은 모두의 주장에 나름의 진실성이 담겨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모두가 진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실의 잣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진리값을 측정할 자가 사라지면 모두가 각자만큼 진실한 것이다.
지젝의 설명이다.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근본적 특성은 명령을 내리는 주인기표(신, 공산주의 등의 정신적 대타자-필자주)의 이런 작용을 없애려 든다는 점이다. 세계의 복잡성은 무조건적으로 확고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 복잡성에 어떤 질서를 부과하려 드는 주인기표는 모두가 해체되고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치판단을 가늠하는 눈이 흐릿해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흐릿한 눈은 구조적 폭력 앞에서 감겨진다. "가장 순수한 사회적·상징적 폭력은 그 대립물,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나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이 무의식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인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거대한 폭력에는 눈을 감은 채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따라 눈앞의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에만 분노한다. 지젝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모순을 이렇게 정의한다.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지젝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다. "환상은 금물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이다."
기득권체제 자체와 대결하려는 거대담론을 대신해 '탈정치적 생명정치'(post-political bio-politics)가 유행이다. '탈정치적'이란 낡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정치'란 생활의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설정하는 정치를 말한다. 두 가지 개념이 결합되면 결국 남는 것은 '생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뿐이다. 생활은 쉽게 관리되지 않는다. 2005년 파리시 교외의 이민자구역 폭동이 그런 사례다. 이 폭동은 프랑스 전체를 흔들었을 정도로 규모나 정도에서 매우 심각했다. 문제는 이런 난동에서 주요한 핵심그룹도, 슬로건도, 요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부수고 때리고 불태웠다. 이들은 왜 이토록 날뛰었던가? 지젝의 설명을 들어보자. "파리 폭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라캉이 '행위로의 이행'이라 부른 현상이다. 행위로의 이행이란 충동을 행동을 통해 표출하는 것을 뜻하는데, 말이나 사유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것이며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좌절감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는 그것을 저지르는 자가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문화분석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인식론적 지도'라 칭했던, 자신이 처한 상황의 경험을 의미 있는 전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점차적으로 '세계없음'(worldless)의 공간으로 경험된다고 말한다. 유토피아적 전망을 가질 때 우리는 현재의 공간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전망이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세계는 그저 시·공간적 장소에 불과하다. 전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고통을 마주할 때 폭동만이 출구가 된다. 지젝은 나치조차 '유대인들의 음모'라는 적을 상정함으로써 자신들 나름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렸다고 말한다. 전망 즉 인식론적 지도가 있어야지만 주체들이 의미를 부여받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더욱 위험하다.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이며 전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없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유지시키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기회가 박탈된 상태로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의미를 와해시키는' 사회경제 질서다."
지젝은 민주주의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잊지말아야 할 게 있다. 그것은 이 민주주의 메커니즘이라는 게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부르주아'국가의 국가기구의 일부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모든 변화를 이루는데 궁극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환상이고, 바로 이 환상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튀세가 말한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위해 '민주주의'라는 윤활유는 부르주아국가기구의 작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혁명적 진리-사건(체제를 넘어서는 계기-필자주)은 폭력을 수반한다고 지젝은 단언한다. 왜 특정 시점의 특정 인민은 폭력화되는 것일까? 지젝의 말이다. "그것은 진리-사건이라는 것이 사회체가 가진 징후적 지점(혹은 징후적 왜곡)에서, 사회적 총체성이 불가능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중의 폭동도 실은 대중의 '폭동'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실패'라는 의미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현대 국가는 자본=네이션(민족국가-필자주)=스테이트(국가기구-필자주)의 삼항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항상성이 매우 강력한 복합체라고 한다. 우리가 자본을 대상으로 타격을 하든, 정서적 공동체인 네이션을 공격하든 또는 행정적 국가기구를 공격하든 이 복합체는 유기적 밀도에 의해 금방 복원된다.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소련조차 자본주의 시스템의 하부구조였다고 진단한다. 그만큼 현 자본주의시스템을 극복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권력자 몇사람을 교체한다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다. 구조적 폭력을 기본값으로 장착한 자본주의를 바꿀 방법은 없을까?
지젝도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책 뒷부분에서 이런 문장을 슬쩍 던진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국가에 대해 이렇게 거리를 두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새로운 양식말이다." 갑자기 뜬금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새로운 양식? 지젝 자신도 별다른 설명이나 보충을 덧붙이지 않는다. 필자가 그의 말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 홉스봄은 책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에릭 홉스봄 지음, 까치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혁명들을 추구한 운동들이 발휘한 힘은 공산주의 조직형태, 즉 레닌의 '새로운 유형의 당'에 있었다. 이것은 20세기 사회공학이 낳은 강력한 혁신물로서, 중세 기독교의 수도원이나 여타 형태의 교단들 같은 창안물에 비견된다. 그러한 조직형태는 작은 조직들에게까지도 엄청난 효율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혁신적 사회조직은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히틀러 독일에 대한 승리는 기본적으로 적군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고, 오직 적군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의한 파시즘격퇴는 오직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홉스봄의 말이다. "히틀러에 대한 소련의 승리는 10월혁명으로 소련에 수립된 체제의 성과였다." 즉 승리 뒤에는 체제가, 체제의 뒤에는 사회조직의 혁신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사회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할 강력한 이론과 설계도가 필요하다. 지젝이 말하려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의 단견을 덧붙이자면 향후 등장할 사회조직이론과 설계도에서는 '영성적 요소'가 충만해야 함을 지적하고 싶다.
지젝은 작은 폭력을 넘어서 구조적 폭력을 보자고 권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개개의 폭력은 사실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픈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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