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밸류업’인가…대주주 배만 불리기에 뿔난 주주들

김은성 기자 2024. 8. 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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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분당 두산타워 / 이준헌 기자

[주간경향] 증시 밸류업(value-up·기업 가치향상)에 역행하는 기업들의 헐값 합병, 상장 폐지 등이 잇따라 발생해 시장 안팎이 시끄럽다. 일반 주주를 배제한 불리한 결정이 발생해도 이를 견제할 방법이 없어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상법(제382조 제3항)은 기업의 이사가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회사’에 ‘주주’를 추가해 일반 주주 권익을 함께 보호하자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상법 개정을 담은 ‘코리아 부스트업 프로젝트’를 중점 추진 법안으로 지정해 추진키로 했다. 정부와 여당 방안이 주주환원 확대를 위해 상속세 완화 등 지배주주 감세에 초점을 맞췄다면, 야당은 기업 지배구조(거버넌스)를 고쳐 일반 주주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무게를 뒀다. 상법 개정 주무 부처인 법무부 관계자는 주간경향과 통화에서 “정해진 입장 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관련 기관들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산 사태, 윤석열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격”

최근 상법 개정 논란에 기름을 끼얹은 곳은 두산그룹이다. 두산은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인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로 이전해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 간 포괄적주식교환을 통해 완전 자회사로 만드는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연 매출 10조원에 달하는 알짜회사 밥캣과 적자회사인 로보틱스 간 주식교환 비율이 시가총액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1 대 0.63으로 정해져 주주들의 반발이 거세다. 반면 총수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두산은 돈 한 푼 쓰지 않고 밥캣에 대한 간접 지분율을 13%에서 42%로 끌어올릴 수 있다. 밥캣에 투자한 일반 주주들의 돈이 두산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에 쓰이는 셈이다.

두산 사태는 해외에서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알리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박유경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 이머징마켓 주식 부문 대표는 지난 7월 24일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두산의 구조 개편은 규제 당국과 유권자들에게 더 나은 주주환원을 약속한 윤석열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것(slap in the face)과 같다”고 비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두산의 구조 개편으로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의 필요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도 보도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도 “구조 개편으로 두산그룹이 재무적 어려움을 겪으면 밥캣에 대한 부정적인 경영 개입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며 두산밥캣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

여론이 들끓자 금융감독원은 합병 관련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하며 제동을 걸었다. 금감원은 “주주들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도록 구조개편과 배경, 주주가치에 대한 결정 내용, 재무안정성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 등에 대해 설명하고 보완하라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상장사 간 합병·교환은 ‘시가로 해야 한다’는 자본시장법에 따른 것이라 합병·교환 비율이 변경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는 9월 열릴 주주총회가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최대 주주인 두산의 지분율이 낮다. 지분 6.7%를 가진 2대 주주 국민연금이 일반 주주와 결집해 반대하면 주총에서 합병안 통과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연금이 연금 가입자와 일반 주주 보호를 위해서라도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를 발휘해 반대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면서도 “상법 개정에 대한 ‘본질’은 덮어두고 금감원이 (적법한 합병에) 제동을 거는 것은 또 다른 관치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국회에서는 김현정 민주당 의원이 투자자 이익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합병가액을 정하고 기업이 공정하다는 증명 책임을 부담하는 ‘두산밥캣방지법’을 발의했다. 이와 별도로 금융위원회는 합병 비율을 개선하기 위해 하반기 중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SK·한화도 지배구조 개편 놓고 주주 반발”

두산과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SK의 지배구조 개편도 도마 위에 올랐다. SK그룹은 SK온의 유동성 지원을 위해 상장사인 SK이노베이션(이노)과 비상장사인 SK E&S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자본시장법상 상장사가 비상장사와 합병할 경우 최근 주가(주당 11만원) 또는 장부상의 순자산가치(주당 24만원) 중 하나를 기준으로 주당 가치(합병가액)를 정할 수 있는데, SK는 이중 금액이 낮은 최근 주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SK이노 측은 “합병 비율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양사가 선정한 독립적인 외부 회계법인의 자문과 평가를 통해 균형적으로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SK이노와 SK E&S의 합병 비율은 1 대 1.19로 정해졌는데, 이노 주주들은 합병 비율이 불리하게 정해졌다며 반발하고 있다. 최근 주가(시가)를 합병가액으로 정하면서 대주주 SK의 지배력은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합병 이후 SK의 SK이노 지분율은 55.9%로 기존보다 19.7%포인트 늘어난다. 반면 자산가치 방식을 택하면 지분율은 47.5%로 이보다 낮아진다. 경제개혁연대는 “합병으로 최대 주주 SK와 SK의 최대 주주인 최태원 회장 일가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SK이노 일반 주주들의 지분가치가 희석되는 손해를 입게 된다”며 “이사회 결정이 전체 주주 이익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합병 승인을 위한 임시 주총은 오는 8월 27일 열리는데, 합병이 성사되면 매출 90조원, 자산 100조원 규모인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민간 에너지 기업이 출범한다.

한화그룹도 공개매수로 잡음이 일었다. 한화에너지가 지난 7월 5일부터 7월 24일까지 한화 보통주 공개매수(주당 3만원)에 나섰는데 매수에 응한 주식은 총 389만8000주(지분 5.2%)로 한화그룹이 목표로 한 최대 600만주(지분 8.0%)에 미달했다.

한화에너지의 공개매수 제시가는 한화 주가순자산비율(PBR) 0.23배에 불과했다. 올해 들어 진행된 국내 공개매수 거래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주주들의 원성을 샀다. 한화에너지는 “책임경영 및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아들들이 지분 100%를 보유한 한화에너지를 통해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보고 있다.

한화에너지는 김동관·김동원·김동선 등 삼 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한 가족회사로, 계열사들의 정보사업과 에너지 공급 일감 등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의 한화 지분 증여 대신, 한화에너지의 한화 지분율을 9.7%에서 17.71%로 확대해 승계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증권가에서는 이례적으로 한화에너지의 한화 공개매수가 책임경영을 강화할지 의문이라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이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한화그룹 승계에 핵심회사가 될 수 있는 한화에너지가 동사 지분율을 확대하는 것이 책임 경영을 강화하는 것인지 많은 의문점이 남는다”며 “지배구조 개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18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열린 SK이노베이션-SK E&S 합병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박상규 SK이노베이션 사장이 합병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니클로 불매로 매출 올린 신성통상, 상폐 논란”

밸류업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이는 건 중견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패션 브랜드 ‘탑텐’ 등을 보유한 신성통상은 주주환원 요구에 자발적 상장 폐지로 응답했다. 신성통상은 지난 6월 자사주를 주당 2300원에 매입하겠다고 밝히며 자진 상장 폐지를 예고해 주주들의 반발을 샀다. 탑텐은 2019년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경쟁사인 유니클로의 힘이 빠지면서 성장했다. 올해는 매출 1조원 돌파를 앞두고 있다. 신성통상이 제시한 매입가는 발표 직전 주가인 1842원보다 높지만, 회사의 순자산을 발행주식 수로 나눈 주당순자산가치(BPS·3136원)에는 훨씬 못 미친다. 주주들의 반발로 첫 공개매수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신성통상이 2차 공개매수를 시도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신성통상이 헐값에 주식을 매입해 상장 폐지한 후 3100억원이 넘는 이익잉여금을 대주주끼리 배당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배당을 외면하는 수법으로 주가를 낮게 유지해 증여세를 줄인 뒤 상장 폐지로 가족 경영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다. 락앤락과 쌍용씨앤이, 커넥트웨이브(다나와) 등 사모펀드가 대주주인 회사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사모펀드 입장에서 상장 폐지를 하면 주주 간섭에서 벗어나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공시 의무도 덜어 신속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

투자자 커뮤니티 등에서는 ‘밸류킬’· ‘밸류다운’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이래서 한국주식시장은 떠나는 게 답이다”라는 냉소가 확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이 사업 재편 과정 등에서 일반 주주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앞선 사례들처럼 이사가 지배주주 또는 경영자와 일반 주주 간 이해충돌 소지가 있는 의사결정을 할 때 일반 주주 이익에도 부합하는지 검토할 수 있도록 상법에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법 개정 의제는 LG화학이 2022년 초 2차전지 사업부를 물적분할한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하면서 점화했다. 알짜 사업 부문을 빼앗긴 LG화학의 주가가 곤두박질하면서 투자자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지배주주 이익을 위해 일반 주주가 희생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법안이 발의됐으나 21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2대 국회에서는 지난 6월 개원과 함께 상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아울러 민주당은 지난 7월 30일 주식시장에서 기업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코리아 부스트업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프로젝트의 주요 과제로 이사회 충실 의무 대상을 전체 주주로 확대, 독립이사 선임 의무화, 감사·이사 분리 선출 단계적 확대, 대기업 집중투표제 확대, 소액주주 의결권 행사 확대 등을 제시했다. 진 정책위의장은 “한국은 주주가 아니라 재벌 회장이 기업의 주인인 것처럼 인식되고 또 행세한다”며 “주주들보다 재벌 회장과 그 일가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경영 행태를 개혁하지 않으면 밸류업은커녕 코리아 디스카운트조차 해소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시장의 저평가 현상을 해결하려면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며 “상법 개정이든 상장회사 특례법 제정이든 (방법에 대해선) 열어놓고 추진하겠다”고 했다.

“불붙는 상법 개정, 이사는 누구를 위해 일하나”

재계는 국회 등에 공동 건의서를 보내며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재계는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가 신속한 경영 판단을 막아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기업이 배임죄 고발 등의 소송 위험에 시달려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한상의는 최근 국내 상장기업 153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사의 충실의무가 확대되면 ‘인수합병(M&A) 계획을 재검토’(44.4%)하거나 ‘철회·취소’(8.5%)하겠다는 곳이 절반 이상 나와 시장의 활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글로벌 행동주의펀드의 경영권 위협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상법 개정 논쟁이 진영 간의 갈등을 넘어 기업지배구조와 자본시장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 과정이 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투자업계 고위 인사는 “사업 재편이나 투자 등의 경영 과정에서 지배주주(경영진)와 일반 주주 간 소통할 수 있는 대등한 권한이 필요한데, 일반 주주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 주는 것이 상법 개정”이라며 “기업이 주주를 신경 쓸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으로 (상법 개정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식투자자 수가 유권자의 30%에 달해 여권이든 야권이든 주주 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며 “완벽한 제도가 없는 만큼 재계도 논의에 참여해 윈윈(win-win·상생)할 수 있는 접점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한 상법 전문가도 “개정을 찬성하는 측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반대하는 측은 역기능만 강조하고 있다”며 “이사가 전체 주주를 위해 일을 한다는 전제 아래, 투자자들의 단기적 재무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배임죄가 남발되지 않게 하는 조항을 넣는 등의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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