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부자’에 마음 빼앗겨…역사적 ‘여성 연대’의 시작 [ESC]

한겨레 2024. 8. 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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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 주짓수
인대 나가고도 수업 참관한 여성
그에게 ‘모든 걸 알려주리라’ 다짐
도장 내 ‘여성 모임’ 결성 의기투합
지난달 21일 서울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열린 주짓수 대회에 참가한 양민영 작가(아래)가 누운 상태에서 팔과 다리를 이용해 상대 선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 조준서 제공

에이(A)가 눈에 들어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함께 주짓수를 수련하는 여성 동료인 그는 어느 날 발가락을 다쳤다. 진단 결과는 인대 손상이었다. 이제 막 스파링하는 재미에 빠진 것 같았는데 최소한 2~3주는 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그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간이 깁스를 하고 나타나서 수업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딱 하루를 쉬더니 이번엔 보호대를 차고 와서 수업을 듣겠다고 했다. 그는 통증이나 불편은 안중에도 없고 주짓수만 할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영혼이라도 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의사 선생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가 대답했다. “저는 원래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아요.”

도장에서 외로웠던 이유

순간 나는 클리셰로 범벅된 케이(K)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에이에게 반했다. 그 하얀 얼굴에, 명랑 만화의 소녀 같은 눈망울에, 주짓수를 잘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는 게 알 수 없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마저 바뀌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혼자 결심했다. 그에게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주고 아는 게 바닥나면 새로 배워서라도 주짓수에 관한 모든 걸 알려주겠다고.

이후 에이와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스무살 무렵에 완전히 졸업한 줄 알았던, 말하자면 단짝이 됐다. 거의 매일 함께 있고 더 가까워질 수 없을 때까지 가까워지고 모든 걸 말하고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주고받는 그런 관계. 어떻게 보면 연애보다도 특수한 관계인 게 사귀는 남자와도 그 정도로 가까웠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친밀함을 주관하는 내 머릿속의 회로는 살짝 망가져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너무 가까우면 거의 발작적인 거부반응이 일었다. 적당한 거리를 잃은 관계는 백이면 백 실패한다는 걸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배웠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와 친밀하고 싶은 감정의 허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먹구름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불안과 팽팽하게 대치하며 갈등의 국면을 만들곤 했다.

그런 내가 에이와는 제동을 걸어볼 시간도 없이 가까워지다니! 우리 사이에 주짓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짓수 얘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이런 여성을 기다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보다 더 주짓수에 미치고 나를 압도할 정도로 열정적인 여성을. 이룰 수 없어서 포기했고 나중엔 결핍된 줄도 모른 채로 살았지만 사실은 줄곧 외로웠다.

주짓수 도장, 그곳에서 여성은 비주류다. 여성 집단은 수적으로 열세일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원인으로 인해서, 동등한 시간을 투자해 수련하더라도 남성 집단보다 평균적인 성장 속도가 느리다. 여기에는 신체 조건의 차이, 남성 위주의 도장 분위기, 남성이 두각을 드러내기 쉬운 격투기 종목의 특성과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한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특히 나를 외롭게 한 건 여성 연대의 부재였다. 사회의 주류가 남성이듯 주짓수 도장의 주류는 남성이다. 주류라는 인식조차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주류. 그들은 정식 수업이 끝나면 빅토리아 시대의 스모킹룸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당대에 담배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고 귀족의 저택에는 스모킹룸이 필수였다. 남성들은 만찬 후 그곳으로 이동해 담배를 피우며 그들만의 사교 활동을 이어갔다. 남성 관원들은 스모킹룸에서 저마다 알고 있는 기술을 공유하고 그 기술을 완성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나는 그런 활동이 남성 집단을 빠르게 성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확신했다.

나처럼 욕심 있는 여성이라면 그 모임에 끼어드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주짓수 도장의 스모킹룸은 빅토리아 시대처럼 여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주류인 남성 그룹과 가깝다는 건 그만큼 주짓수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음을 뜻한다. 남성 관원들은 대체로 여성에게 우호적이고 친절하지만 나는 그 속에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친화력이 부족한 성격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내가 남성이 아니라는 거다. 여섯 살 때 뒷산으로 놀러 가는 오빠와 그의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었던 이유이자 평생 무모한 모험도, 방랑도, 노숙도 불가하다는 걸 알고 나를 절망케 했던 바로 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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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여성 대회까지

그래서 우리는 도장 내의 여성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대학 때 여성주의 소모임을 만든다고 벽보를 붙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에이는 아직 초보이고 나에겐 모임을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에이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노’(no)를 모른다. 온통 안된다는 말뿐인 세상에서 그의 대답은 항상 긍정형이다.

지난 5월, 나와 에이를 포함해 4명의 회원으로 여성 모임의 닻을 올렸다.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뜻밖에도 나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는 게 없어서 남에게 알려주지 못한 게 아니라 알려줄 일이 없어서 아는 게 없다고 느꼈던 거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아는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자 나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는 게 많았다.

이 낯선 모임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여성들끼리 기술을 공유하고 궁금한 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주짓수를 매개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쪼개서 모임에서 공유할 기술을 찾고 그것을 익히고 모임 참가자들에게 전달할 사항을 정리하느라 머릿속은 항상 분주했다. 실수투성이인 시연도, 어설픈 설명도 참가자들이 모두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기로 했다. 마침 여성만 참가할 수 있는 주짓수 대회의 시작이 한 달여쯤 남아 있었다. 기존의 주짓수 대회도 성별과 체급을 엄격하게 구분하는데 굳이 여성 대회가 필요하냐고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짓떼라(주짓수를 수련하는 여성)들은 주짓수계에서 비주류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대회의 취지에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공감하며 발 빠르게 호응했다. 나와 에이도 축제의 대열에 합류했다. 바깥에는 서늘한 장맛비가 쏟아지는데 주짓수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덥히고 있었다.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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