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범하고 개인적인 그늘 직관 [주말을 여는 시]
허만하 시인의 ‘그늘에 관한 노트’
보이지만 잡을 수 없는 그늘들
‘내’가 있어야만 존재하는 속성
원로 시인의 집요한 그늘 탐구
그늘에 관한 노트
1
그늘은 밤새 바닷물에 감은 불꽃 머리칼을 흔들며 수평선을 차고 솟아오른 에너지로 하늘을 회전하는 태양이 아득히 먼 지구를 조준하여 던지는 엷고도 엷은 평면이다.
그늘의 바탕인 지구 자신의 그늘은 기하학적으로 있지만 그것을 본 시선이 없다. 지구의 그늘은 좌표로 잡을 수 없는 비어 있는 넓이 어디쯤에서 황홀하게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는 것은 우리들 시대가 아니고, 우리들도 아니다. 한정 없는 넓이 안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감각과 인식이다. 감각과 언어다.
2
그늘에는 내장이 없다. 그늘은 오직 엷다. 엷음의 극한을 초월한 엷음에는 무게가 없다. 그늘은 면적이다. 면적에는 두께가 없다. 그늘은 지도처럼 장소에 집착한다. 그늘은 높낮이가 없는 뚜렷한 윤곽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늘은 모든 색채를 섞으면 생기는 희박한 잿빛이다.
내가 내 육체를 가지듯 나는 내 그늘을 가진다. 내 그늘은 나에게 밀착한다. 그늘은 스스로 먼저 움직이기를 체념한 슬픈 운명이다. 내가 일어서면 그늘은 자동기계처럼 면적을 조절하면서 따라 움직인다. 눈부신 불꽃 덩어리가 하늘 한가운데에 자리하는 정오가 되어 내 발바닥에 밟힐 때까지 그늘은 자신의 축척에 따라 넓이를 줄인다.
3
그늘은 부피가 없는 물상으로, 자신의 뿌리인 태양의 직사광선을 실천적으로 거부하는 쓸쓸한 저항이다. 우리들 내부를 싱싱한 하나의 계절이 지난다. 새로운 계절과의 만남을 틈타, 5월의 가로수 잎새에서, 먼 바다 표면에서 미래를 예감한 그늘은 추억의 경계를 드러내며 겨울 하늘 별빛처럼 가늘게 떨며 반짝인다. 세계는 조금 느슨하고 지나치게 넓고 선선하다.
내 시선은 어둠의 넓이 바깥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눈빛으로, 비어 있는 세계와 나를 잇는 내 육체의 펄떡이는 현실이 된다.
허만하
· 1957년 「문학예술」 데뷔
·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등 다수
·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
「언어 이전의 별빛」, 솔출판사, 2018.
당신은 어떤 '그늘'을 가지고 있는가. '그늘'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아니면 기억인가, 현존인가. 허만하 시인의 '그늘에 관한 노트'는 그러한 그늘의 보고서나 마찬가지다. 현상적 그늘과 추상적 그늘이 혼재하거나 교차하며 나타난다.
'1'에서 언술한 '그늘'은 거시적 입장에서 크고 대범하게 통찰한 그늘이다. 지구 전체에 드리운 '그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수평선을 차고 솟아오른 에너지"의 이면이다. 동시에 "태양이 아득히 먼 지구를 조준하여 던지는 엷고도 엷은 평면"이다.
이 그늘은 자신만의 공간을 획득하지만 영원할 순 없다. "좌표로 잡을 수 없는 비어 있는 넓이 어디쯤에서 황홀하게 사라지고" 마는 속성을 지닌다. '1'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늘은 '역사성'과 '순환성'을 동시에 지닌 우주적 차원의 법칙을 갖는 그늘이다. 그런데 "사라지는 것은 우리들 시대가 아니고, 우리들도 아니다. 한정 없는 넓이 안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감각과 인식이다. 감각과 언어다"라고 화자는 언술한다.
이것은 우주적 차원의 그늘을 감각적 차원과 언어적 차원의 그늘로 전환하는 말로 그늘을 느끼는 감각과 인식이 없다면 '그늘'이라는 언어조차 획득할 수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시상이 '2'와 '3'에서 확장되도록 '감각-인식-언어'가 한몸임을 전제했다.
'2'에 나타난 '그늘'은 미시적 입장에서 한 개인이 가진 그늘이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나'와 제일 밀착된 '어떤 것'이 그늘이다. '내장'도, '무게'도, '두께'도 없이 엷음의 상태로 '면적'을 갖는다. 그늘은 "장소에 집착"하는데, "높낮이가 없는 뚜렷한 윤곽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나'가 있어야 '나의 그늘'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나의 그늘'은 "스스로 먼저 움직이기를 체념한 슬픈 운명"이 돼 자웅동체로서 평생을 '나'와 함께한다.
'3'에 나타난 '그늘'은 "부피가 없는 물상으로" 순전히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늘이다. "자신의 뿌리인 태양의 직사광선을 실천적으로 거부하는 쓸쓸한 저항"인 동시에, "우리들 내부"에 자리한 "싱싱한 하나의 계절"이다.
계절은 '나'의 감각과 인식에 의해서만 싱싱해진다. "새로운 계절과의 만남을 틈타, 5월의 가로수 잎새에서, 먼바다 표면에서 미래를 예감한 그늘은 추억의 경계를 드러내며 겨울 하늘 별빛처럼 가늘게 떨며 반짝인다."
그러니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늘'은 나의 현존을 드러내며 '세계'을 표상하는 인식과 감각이다. 여기서 '세계'는 나만의 감각과 인식으로 포착한 "어둠의 넓이 바깥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눈빛으로" 감지된, 텅 빈 '세계'인 동시에 '나'를 '잇는' "육체의 펄떡이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세계'이다.
놀랍다. 원로 시인의 집요한 '그늘' 탐구가 젊은 시인 못지않은 치열함을 가지고 감각적으로 표출돼 있다. 허만하 시인의 시적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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