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5배' 부른 이유? 기준점 효과 [딥THINKING]

김재현 전문위원 2024. 8. 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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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챗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많이 아는 것보다 사고의 깊이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AI시대의 Deep thinking(깊이 생각하기)을 고민해봅니다.

미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31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에서 열린 선거 유세 무대에 올라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연설을 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유세중 벌어진 암살 미수 사건이후 펜실베이니아를 다시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박빙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2024.08.01 /AFPBBNews=뉴스1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과 11월 대선을 앞두고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겠지만, 당장 한국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트럼프의 주한미군 분담금 '5배' 인상 요구
트럼프 행정부는 1기 때인 2019년 한국에 주한미군 철수까지 시사하며 1조389억원이었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5배' 인상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 방위비 협상을 벌였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승인을 거부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2021년 3월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자 겨우 새로운 협정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추이/그래픽=김지영

한국과 미국은 2021년 방위비 분담금을 13.9% 인상한 1조1833억원으로 정했으며 향후 4년 동안 매년 우리 국방비 증가율(매년 평균 6.1% 예상)에 연동해서 분담금을 올리는 데 합의했다.

지금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언급하며 당선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방위비 분담금 '5배' 인상요구는 '기준점 효과'(anchoring effect)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다. '5배'라는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인상을 요구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우리가 '2배' 인상에 합의해도 '5배' 인상과 비교하면 성과를 거뒀다고 착각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부터 부동산 개발사업을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은 자서전 '거래의 기술'에서 밝힌 것처럼 기준점 효과 등을 이용한 탁월한 협상 기술로 사업에서도 큰 성과를 거뒀다.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기준점 효과
기준점 효과를 자세히 살펴보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고(故) 대니얼 카너먼은 베스트셀러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당해서 '기준점' 효과를 다뤘다. 기준점 효과는 모르는 수량을 추정하기 전에 특정 값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나타난다.

즉, "간디가 114세가 넘어 사망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 35세가 넘어 사망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보다 사망 나이를 훨씬 높게 예측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간디는 1948년 79세의 나이로 암살당했다.

심리 현상에는 실험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많지만, 실제로 측정 가능한 건 거의 없는데 기준점 효과는 예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과학관을 찾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①가장 큰 미국삼나무는 높이가 1200피트(366미터)보다 클까 작을까?
②가장 큰 미국삼나무의 높이를 최대한 정확히 추측하면 몇이겠는가?

이 실험에서 '높은 기준점'은 1200피트다. 다른 참가자 일부에게는 첫 번째 질문을 180피트(55미터)의 '낮은 기준점'으로 바꿔서 물었다. 기준점의 차이는 1020피트(311미터)다. 예상대로 두 그룹이 내놓은 평균 추정치는 844피트(257미터)와 282피트(86미터)로 무려 562피트(171미터)의 차이가 발생했다.

참고로 미국삼나무(Sequoia·세쿼이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로 최대 약 116미터까지 자란다.

기준점지수는 제시한 기준점의 차이(1200-180=1020)와 그에 따른 추정치 차이(844-282=562)의 비율로 표현하는데, 이 실험에서는 55퍼센트에 달했다(562/1020).

기준점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 그 값을 그대로 추정치로 내놓은 사람은 기준점 지수가 100퍼센트이며 기준점을 아예 무시하는 사람은 기준점 지수가 0퍼센트다. 이 실험의 55퍼센트는 전형적인 수치다.

기준점 효과는 실험실에서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영향력도 막강하다. 집을 살 때도 매도 호가가 낮을 때보다 높을 때 더 가치 있어 보이고 그런 숫자에 영향을 받지 않기로 결심해도 소용없다. 숫자를 예측하는 질문을 받고 답을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이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드 '더 오피스'를 통해 본 기준점 효과에 대응하는 방법
미드 '더 오피스'에서 마이클 스캇의 협상 장면 /사진=WSJ 유튜브
트럼프 전 대통령처럼 기준점 효과를 유도하려는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7월 11일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이 협상학의 대가인 구한 수브라마니안 교수가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한 영상을 소개했다. 이 영상에서 수브라마니안 교수는 미드 '더 오피스'(The Office)의 한 장면을 보여줬다.

'더 오피스'는 '던더 미플린'이라는 종이회사를 배경으로 지점장 마이클 스캇(스티브 카렐 분)과 직원들의 회사생활을 다룬 코믹 시트콤이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아홉 시즌이 방영됐으며 2018년 넷플릭스 전체 콘텐츠 스트리밍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요즘도 인기를 끌고 있다

'더 오피스' 시즌5 에피소드 25에서는 마이클 스캇이 던더 미플린에서 독립해서 만든 '마이클 스캇 종이회사'가 이전 회사의 고객을 뺏어왔음에도 파산 직전에 놓인 상황이 다뤄진다. 다행히 던더 미플린의 최고재무책임자(CFO) 월러스는 스캇의 회사를 인수해서 고객을 되찾기로 결정한다.

협상은 월러스가 '매우 관대한 제안'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시작되지만, 스캇은 즉시 "우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한다. 옆에 앉아 있던 동료 라이언이 놀라면서 아직 제안을 듣지도 못했다고 말하자, 스캇은 "우리는 절대 첫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월러스에게 두 번째 제안을 묻는다.

수브라마니안 교수는 협상에서 첫 번째 제안을 수락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스캇의 생각은 옳지만, 첫 번째 제안을 듣지도 않고 두 번째 제안을 요청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웃으면서 지적한다.

카너먼 교수도 협상에서는 대개 먼저 시작하는 쪽이 유리하며 처음 던지는 기준점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특히 상대가 터무니없는 제안을 내놓으면 똑같이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맞받아쳐서 이후 협상에서 줄이기 힘든 격차를 만들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보다는 소란을 피우든, 뛰쳐나가든, 나가겠다고 협박을 하든, 상대가 제시한 숫자로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이어 월러스는 1만2000달러에 마이클 스캇 종이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한다. 스캇은 단호하게 거부하며 "장난하는 건가요? 모욕적일 정도로 낮은 가격이네요. 첫 번째 제안이 어땠는지는 듣고 싶지도 않네요"라고 말한다.

수브라마니안 교수는 스캇이 월러스에게 첫 번째 제안을 하도록 한 것을 평하는 대목에서 "첫 번째 제안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좋다"며 "특히 사업을 매각하는 입장에서는 첫 번째 제안을 통해서 협상을 높은 숫자에 고정(anchor)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 매각과는 다소 다르지만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폭을 '5배'라는 높은 숫자에 고정하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협상의 달인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협상에서 BATNA가 미치는 영향
구한 수브라마니안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사진=하버드대 로스쿨
다시 오피스로 돌아와서 월러스가 '마이클 스캇 종이회사'의 재정난을 언급하며 스캇의 협상 입장을 망해가는 회사의 매각자로 폄하하자, 스캇은 "당신의 회사(던더 미플린)는 고객을 계속 잃고 있으며, 곧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지점에서 왜 손실이 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반격한다.

여기서 수브라마니안 교수는 협상에서 '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의 의미를 설명한다. BATNA는 협상이 결렬됐을 때 참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뜻한다. BATNA가 막강한 참여자는 언제든 협상을 끝내고 협상 테이블을 떠날 수 있기에 협상에서 우위에 서게 된다.

수브라마니안 교수는 마이클 스캇이 "이봐요. 제 BATNA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당신의 BATNA에 대해 한번 말해볼까요"라고 하면서 상황을 뒤바꿨다고 격찬했다.

주한미군 철수까지 내세우며 '5배' 인상을 요구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만약 정말로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BATNA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다만 '주한미군 철수'는 블러핑(bluffing, 허세)일 가능성이 크다. 또 만약 미국이 정말로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대안, 즉 BATNA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스캇의 협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협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재현 전문위원 zorba0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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