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대북 수해 지원, 북한이 받을까?

김예진 2024. 8. 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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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우상화·단합 독려 캠페인성 기사 연일 도배
남북, 서로 ‘깜짝 제안’, ‘반전 수용’ 정치적 고려도
아웅산 테러, 천안함 피격 직후에도 수해는 지원
정부 제안에 미국, 야당, 민간단체 모처럼 “환영“
정부 제안, ‘북 주민’에 초점 맞춘듯
“윤석열 싫다“던 북, 주민 고통 외면하고 거부 가능성
비관론 불구, “북 당국, 수용해야” 지적 높아

“여기가 어디라고 오신단 말입니까”, “자그마한 고무단정을 타시고 물에 잠긴 피해 지역을 돌아보시는 거룩하신 모습”

북한 신의주 홍수 6일째인 2일, 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실린 ‘조국의 북변 피해지역 인민들이 터치는 격정의 목소리를 전하며’ 기사의 일부다. 노동신문은 7월 29일자부터 신의주 수해를 보도하기 시작해 수해 참상과 관련자 문책→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응 우상화→김 위원장의 행보에 감화받은 인민들→전국 각지 도움의 손길→‘전화위복’을 위한 단합 캠페인으로 전환하며 수해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관련 보도는 노동신문에 전날 8건, 이날 9건이나 쏟아지며 6면짜리 노동신문에 도배되다시피 했다. 신의주 수해의 인적, 물적 피해 규모가 정확히 공개되지 않고 있으나 통일부가 자체 위성사진 분석을 한 결과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여의도 면적 4배 크기의 섬 위화도 전체가 잠긴 모습이 식별될 정도였다. ‘인민들의 격정’과 같은 캠페인성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은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일 수해 복구를 위해 "벌써 평양시에서만 510여 명 청년동맹일꾼들이 탄원해 나섰으며 김정숙평양방직공장 등 각지 공장 기업소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청년들이 탄원자 명단에 이름을 써넣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선교구역 청년동맹위원회. 평양=노동신문·뉴스1
◆남북 수해 지원의 역사

정부는 홍수 닷새째인 1일 수해 관련 대북지원을 공개 제안했다. 남북관계사에서 수해 지원은 ‘동포애‘, ‘민족애’를 명분으로 했지만 당국간 정치적 수싸움과도 무관치 않았다.

1984년 북한의 남한 수해 지원은 대표적이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 이듬해, 북한이 남한에 수해 지원을 전격 제안해왔다. 전두환 정권도 예상을 깨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해 지원 제안은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인한 국제적 지탄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전두환 정부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자 인수·인도를 위해 직통전화가 4년만에 재개됐고 막혀있던 남북관계는 다시 복원됐다. 전두환 정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는데 가장 필수적인 환경, 즉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한반도 상황을 얻어냈다. 통일부가 최근 공개한 1980년대 남북회담사료에도 이같은 배경이 담겨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활짝 열린 남북교류 시대에는 남한에서 여러차례 지원 물품이 보내졌고 체제 우위를 보여주는 간접 증명이 되기도 했다. 2005년, 2006년, 2007년, 2010년 총 4차례에 걸쳐 1297억원 상당의 구호물품과 쌀, 시멘트, 자재장비 등이 보내졌다. 2010년은 지원때는 불과 2년 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넉달 전 천안함 피격 사건이 있었던 상황에서도 수해 지원이 이뤄진 것이었다. 북한인권보고서 등의 탈북민 증언을 보면 2000년대 북한 주민들이 접한 남한의 물자가 끼친 영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7월 31일 내각과 성·중앙기관 일꾼들이 '특급재해비상지역' 수재민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 28일 신의주시를 비롯해 평안북도와 자강도 일대에 내린 폭우로 압록강이 범람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평양=노동신문·뉴스1
◆정부 제안, 북한 주민 향한 메시지 일환인듯

윤석열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부터 윤석열  정부 출범 이래 줄곧 “정치·군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인도적 지원에 열려있다”는 원칙을 견지한다면서도, “통일부가 대북지원부같다“(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며 질타했던 탓에 이번 수해에 대북 지원 입장을 밝힐지 불투명해보였다. 

통일부는 1일 오전까지도 북한에 지원 제안이나 유감 표명 등을 할지 질문에 “상황을 주시하겠다“며 유보적 입장이었지만, 이날 오후 예상을 깨고 대북지원 입장을 전격 발표했다. 최근 대통령실과 정부 안에서도 남북관계에 반전 모멘텀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생겨나는 기류다.

다만 이번 정부 발표문에는 북한 당국과 북한 주민을 구분하는 현 정부의 기조가 뚜렷했다. 한적의 발표문에는 “북한 주민들에게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 “북한 주민들이 처한 인도적 어려움에 대해”, “북한의 이재민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자들을 신속히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등 ‘주민’은 4번 언급하지만 결정권을 갖고 있는 ‘북측 당국’은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북측 적십자회’가 아니라 “‘북한 적십자회’와 협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북은 과거 접촉때 북한·남한, 북조선·남조선 대신 북측·남측이라 사용하며 상대에 대한 호칭을 유의해 사용해온 것을 고려하면 의도이거나 작지 않은 실수다.
박종술 대한적십자사(한적) 사무총장이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대북 수해지원 물자 지원'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각국 지원의사 ... 미, 한국의 대북 수해지원 제안 지지

국내외에선 정부 대북지원 입장에 환영, 지지 입장이 이어지고 있다. 경색된 남북관계 돌파구를 만들라는 촉구도 봇물터지는 모습이다.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대북지원 입장에 관한 논평을 요청한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우리는 북한에 중요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을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다”며 “우리는 미국이 (대북) 인도적 지원을 비핵화와 별개로 본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에서도 모처럼 정부에 환영 목소리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정부 제안을 환영한다며 “인도적 지원은 진보 정부 전유물이 아니다. 이명박·박근혜정부도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평화의 물꼬를 터야할 때”라고 했다.

대표적 남북교류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측도 성명을 내고 정부의 제안을 환영했다. 이들은 “수해는 단기간에 그치지 않는 만큼 긴급지원뿐 아니라 중장기적 협력이 필요하다”며 “남북 당국간 직접지원은 물론 민간, 해외동포,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 등 모든 채널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자유아시아방송(RFA)가 중국 단둥 소식통에게서 제보받아보도한 압록강 범람 당시 사진. RFA제공
◆북, 제안 받을까
문제는 북한이다.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다는 비관론이 우세하다. 윤석열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 권영세 당시 통일부 장관이 북한에 코로나19 방역을 적극 돕겠다고 제안했지만 북측은 무응답으로 거부했고 정부는 대북통지문조차 보내지 못했다. 이어 2022년 8월 “우리는 윤석열 인간 자체가 싫다“며 극언을 담은 김여정 부부장 담화로 정부의 ‘담대한 구상’도 거부한 바 있다. 또 구명조끼 없이 고무보트를 타거나 자동차가 흙탕물에 반쯤 잠긴 채 현장을 돌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을 연일 TV로 방영하며 위기 극복을 주도하는 리더로 우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지원을 받으려 할 가능성도 낮아보인다. “고난의 행군도 버틴 우리”라며 자존심을 앞세우는 곳이 북한 사회다. 
김정은 위원장이 침수지역을 돌아보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실제 일부에선 북한이 중국의 지원을 이미 거부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RFA는 최근 익명의 북한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정부가 위화도에 고립된 주민을 구출하겠다는 의사를 북한에 전했지만 중국으로 구조될 경우 이재민이 한국으로의 탈북 등을 우려한 북한이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정부 접촉 제안은 나름 의미가 있다“면서도 “북한이 남북관계를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교전국 관계로 규정한 상황이고 실제로 전단지, 확성기와 오물풍선으로 강대강 대결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남한의 수해지원물자를 수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측도 인도적 지원제의를 묵살하거나 거부를 한다면 국제사회로부터 더 큰 비난 자초할 것“이라며 “남북한은 인도적 지원 협의를 계기로 연락선 복원과 남북관계정상화로 나아가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침수지역 돌아보는 북한 김정은.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이상근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북한의 수해 대응 특징은 초기대응 취약, 사후 군대 동원, 이재민 구호보다 건물 등 재건에 가용자원 집중, 복구 성과를 지도자 우상화에 이용하는 것이었다“며 “다만 이번엔 이례적으로 군대를 신속 투입해 구조작업을 벌이고 구호품 전달에도 힘쓰는 등 과거와 달라진 면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재해대응을 위한 물자가 비축되지 못해 상시대응체계가 정상 작동하지 않는 이상 피해를 줄이기 어렵고, 당국이 국제기구와 NGO 구성원의 입국을 불허하며 외부의 지원을 거부해 효과적 대응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거듭되는 홍수 피해에 주민 불만이 가중될 것“이라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재해 물자를 비축해 재해 대응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도록 해야 하는데, 자력으로 대응이 어렵다는 점을 북한이 인정하고 외부 지원을 수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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