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새’ 되어 함께 날아가는 우리 [콘텐츠의 순간들]
6년 만에 만난 친구와 타이(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쏨땀, 춘권, 팟타이, 바질 볶음밥. 가벼운 음식을 먹고 싶다는 나를 위해 친구가 예약해준 타이 레스토랑의 음식들은 모두 훌륭했다. 후식으로 나온 진저비어를 반쯤 비웠을 때, 나는 친구에게 근처 카페로 이동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갑자기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오늘은 약속 없나 봐? 예전엔 나랑 만나다가 저녁에 데이트하러 가고 그랬는데.” ‘내가 언제!’라는 반사적인 대꾸가 입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는 반쯤 남은 진저비어를 단숨에 들이마시며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그때 지독한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X)’였나 봐….”
그 자리에서 나는 왜 내 과거를 부끄러워하며 사과했을까? 그건 아마도 ‘이중 약속’을 잡아 친구를 섭섭하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굳이 ‘남미새’란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과연 우리 관계의 오해를 풀 수 있는 적절한 사과였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왜 그 행동을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여자’는 코미디언 강유미의 유튜브 채널에서 백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히트 콘텐츠다. 이 영상에서 강유미는 무속인들이 귀신을 퇴치하는 내용의 케이블 프로그램 〈엑소시스트〉(tvN)를 패러디하여 남미새를 ‘악령’이나 ‘귀신’으로 규정하고, 직접 ‘남자에 미친 여자’를 연기한다. 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강유미의 옷걸이에는 손바닥 정도 되는 ‘독기룩(중요 부위만 겨우 가리는 옷으로 한 여초 커뮤니티의 ‘난 독기 가득하다’라는 제목의 게시글에서 탄생한 조어다)’만 잔뜩 걸려 있다. 네 시간 동안의 준비 끝에 강유미는 “이렇게 빡세게 꾸며야 남자들이 오히려 못 다가온다”라는 납득하기 힘든 변명을 하는데, 여기까지의 전개에서 ‘남미새’의 뜻은 오직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취향을 가꾸고 시간을 쓰는 이성애자 여성이다.
한껏 꾸민 ‘남미새’ 강유미는 친구를 만난다. 식사 메뉴를 정할 땐 ‘오빠가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고,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우리 오빠가 비 맞을 걱정’을 하는 강유미는 모든 대화의 끝을 남자친구 이야기로 맺는다. 남미새 강유미는 고민 상담을 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성의 없이 대답하다가 “남자가 없어서 그렇다. 여자는 남자라는 울타리가 있어야 한다. 사랑받는 건 여자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결국 친구는 인내심을 잃고 달아나지만, 강유미는 끝까지 자신을 변호한다. “전 여자보다 남자들이 편한 것 같아요. 여자들은 대화가 어렵다고 해야 하나? 제가 좀 털털하다 보니까….” ‘남미새’ 강유미의 이 자기합리화는 자연스럽게 여성들을 ‘대화하기 어려운 존재’ ‘사소한 것으로도 예민하게 구는 존재’로 만든다. 여기서 강유미가 표현하는 남미새는 연인과의 관계에 매몰되어 여성 간의 우정을 소홀히 하고, ‘사회적 남성성’을 옹호하는 이성애자 여성이다.
‘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여자’를 통해 알 수 있는 남미새의 특징은 이렇다. 남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치장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여자, 다른 여성들은 적으로 여기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여자, 연인이나 남성과 보내는 시간이 늘 우선인 여자, 사회적 사안에서 여성보다 남성의 입장에 더 이입하는 여자. 이처럼 ‘남미새’는 이성애자 여성들 간에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과 복잡한 감정들을 거칠게 축약한 단어다. 여성 간의 연대를 깨트리는 여성을 향하는 멸칭, ‘페미니즘 리부트’를 함께 겪으며 탄생한 ‘4B(섹스·연애·결혼·출산 거부) 운동’의 보조적인 구호, 연대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피로감을 추스르는 자조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
‘남미새’라는 이름 짓기는 가까운 동성 친구에게 느끼는 실망과 배신감부터 낯선 여성들에게서 느끼는 모멸감과 적대감까지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 쉽고 빠른 구분이다. 이것은 연대의 빠른 결속에 매우 효과적인 페미니즘 전략이지만, 동시에 다시 여성들을 멸시해야만 가능한 불완전한 방식이기도 하다. ‘남미새’라는 개념에 얽힌 다양한 층위의 문제만큼, 이 단어가 발휘하는 기능 또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남자 얘기 좀 그만해!’ 진저리 치면서도
다시 ‘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여자’의 엔딩을 보자. 남미새 영혼을 퇴마하기 위해 드디어 엑소시스트 무당이 등장한다. 무당은 ’이성에게 인기 많아지는 주파수’가 흐르는 강유미의 방을 샅샅이 뒤져 마치 저주받은 물건처럼 ‘독기룩’을 찾아낸다. 무당이 “너 누구야!” 하고 묻자 “남미새요!”라고 대답한 귀신의 영혼은 ‘티팬티’를 가위로 자르자 마침내 강유미의 몸에서 빠져나간다. 빙의가 풀린 강유미는 자신 때문에 힘들어했던 친구를 찾아가 그간의 일들을 사과한다. 그런데 사과를 받아들인 친구는 위로를 해주다 말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 오빠도 널 걱정하더라고.” 강유미에게서 빠져나간 ‘남미새’ 귀신이 친구에게 옮겨간 것이다.
댓글창에서는 이 엔딩을 두고 대부분 “남미새는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라 했지만, 나는 이것이 영상에서 가장 핵심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남미새였고, 너도 남미새가 될 수 있다.’ ‘불치병’이라는 댓글처럼 이 결말은 여성들의 연대를 억압하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결말 이후의 장면을 자유롭게 상상하며 희망을 본다. 아마도 강유미는 남미새에 빙의된 친구를 자신이 겪은 방식대로 돌볼 것이다. 이들은 살아가며 몇 번이나 더 ‘빙의’와 ‘퇴마’를 반복하게 될지 모른다. ‘그놈의 남자 얘기 좀 그만해!’ 진저리를 치고, ‘티팬티’를 자르면서.
여성을 향한 사회적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미움과 갈등 또한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여전히 ‘갈등’ 정도로 인식하는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은 남성을 향해 가지는 성애의 감정과, 자신도 모르게 내재된 남성중심적 사고를 늘 검열하며 여유를 잃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남미새’라는 이 멸시와 구분의 언어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남미새’라는 단어 속에 뭉뚱그려진 여성 간의 실망감·배신감·모멸감을 섬세하게 구별해 인식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것은 반드시 서로의 모순을 포용하는 이해의 언어로 바뀌게 될 것이다. 나를 향한 멸칭을 긍정하는 것은 연대가 필요한 집단의 오랜 투쟁 방식 중 하나다. 내 안의 남미새를 긍정하면, 그 욕망이 연대와 충돌하지 않을 방법 또한 마련할 수 있다. 나는 ‘남미새’라는 사회의 유구한 ‘남자 사랑’ 풍토를 깨트릴 결정적 구호를 지지함과 동시에 그로 인해 혼란과 자괴감을 겪는 남미새들을 위해 기꺼이 함께 추락하며 기다리자는 말을 건네는 중이다.
복길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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