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십니까? 식물도 좀 같이 갑시다 [임보 일기]
식물을 임보하려면 먼저 버려진 식물을 구조해야 한다. 내가 임보하는 식물은 대부분 서울 내 재개발 예정지의 쓰레기장 틈바구니에서 온다. 사람이 떠나 폐허가 즐비한 재개발 단지는 황망하고 스산한 분위기일 거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자연의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다. 이리저리 자유롭게 자라나는 식물들, 멋진 집을 지은 제비와 벌린 입만 집 밖으로 내놓고 밥을 기다리는 새끼들, 자동차가 많이 다니지 않으니 도로 한가운데서 느긋하게 일광욕하는 고양이 등 재개발 단지의 자연은 도심 속 숨겨진 정글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작은 골목길에서 불쑥 사람이 나타나면 서로 놀란다.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폐허에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다니는 이들이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도 현금화할 수 있는 것들을 챙겨가는 고물상과 고미술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버려질 것을 가져가서 재활용하는 마음은 좋지만,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점은 조금 안타깝다. 딱 한 번 이름 모를 나무를 들고 가는 분을 본 적 있다. 무슨 나무인지 궁금해서 여쭤봤더니 ‘오가피나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약으로도 쓰는 오가피는 값이 꽤 나간다고 한다. 때로는 남겨진 길고양이를 돌보는 분도 종종 마주친다. 밥과 물을 챙겨주는 일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쪽에 고양이 습식 캔을 무더기로 쌓아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놓은 모습을 보면 양가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마주하면 제일 곤란하고 피곤한 사람은 재개발 단지 조합과 관련된 이들이다. 처음으로 덩치 큰 남자 여럿이 나를 둘러싸고 무작정 여기 오지 말라고 했을 때, 나는 그들의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주었다. 굳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꽤 공손했다. 그들은 내게 ‘도의적으로’ 이 활동을 이해하지만 조합 측에서 반기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길을 걷고, 재개발 단지 풍경 사진을 찍고, 영상 촬영을 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법적 근거가 있을까? 혹시나 하고 변호사에게 상담한 결과 내 예상대로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재개발 지역에서 식물을 구조하다 보면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다. ‘우리가 CCTV로 당신 돌아다니는 것 다 보고 있다’ ‘촬영하지 말라니까 왜 자꾸 사진을 찍냐?’ ‘여기 돌아다니는 것 불법이다. 빈집에 들어가는 거 다 봤다’…. 나는 요즘 재개발 단지 용역의 말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더 이상 참지 않는다. 길거리 촬영은 불법행위가 아니고, 나는 절대 공가나 출입이 금지된 곳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나뿐인 것도 아니었다. 강아지 목줄 풀고 산책시키는 사람도 여럿 봤고, 마을버스도 버젓이 다니고, 차와 오토바이도 지나다니는 곳에 왜 나만 오면 안 되나? 서울시에 문의했을 때 돌아온 답변은 그 지역 조합원의 권한이라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렇다면 마을 환경사업이라 써 붙이고 배포한 길거리 화분과 그곳에 심어진 식물 정도는 담당 지자체에서 책임지고 수거해야 하지 않을까?
식물 임보할 때 가장 힘든 점
식물을 임보하며 가장 힘든 점은 그것을 돌보고 키우는 일이 아니다. 식물이 아니라 식물을 버리고 간 사람, 무턱대고 오지 말라는 사람 등 사람이 제일 힘들다. 반면 또 힘이 되어주는 것 역시 사람이다. 면박을 주고 위협하는 사람 때문에 진이 빠질 때도 종종 만나는 따듯한 사람들 덕분에 계속 활동할 수 있다. 식물 구조에 관심을 보이며 ‘저쪽에 많이 있다’고 위치를 알려주는 분, 우리 집에 그릇이 예쁜 게 많은데 처치 곤란이라며 집에 데려가 나눠준 분도 계셨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도 5년 안에 재개발이 된다는 이야기가 무성하다. 그때가 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조합이나 이웃과 함께) 이사 가기 전 식물을 나누거나 판매하는 등 건강한 방법으로 식물도 이사 시키고 싶다. ‘식물 이주’ 역시 재개발 단지의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되는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구조를 이어간다. 이루지 못할 꿈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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