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건설 신화, 해외 누적 수주 1조 달러 도전 지난달 국내 건설업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한국수력원자력을 필두로 대우건설 등이 참여한 ‘팀코리아’가 24조원 규모의 체코 원전 건설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원전 건설은 터빈과 같은 원전기술은 물론 건설기술이 중요한 사업이다. 총 사업비의 약 60%가 건설공사에 쓰인다. 체코 원전을 발판으로 한국형 원전의 유럽 진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만큼, 국내 건설업계에도 기대감이 감돌고 있다. 내년 해외시장 진출 60주년을 앞두고 해외건설 누적 수주액 ‘1조 달러’ 달성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서울 여의도 면적의 3분의 2 정도인 베트남 하노이의 신도시 ‘스타레이크 시티’는 기획과 토지보상, 인·허가, 자금조달과 시공, 분양 및 운영까지 도시개발 전 과정을 대우건설이 주도했다. 주거·상업·행정·교육·문화시설이 모두 갖춰지는 ‘한국형 신도시’다. 베트남의 도시화 가능성을 내다본 대우건설은 1990년대 베트남에 진출해 베트남 정부와 협력하며 이 사업을 주도했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스타레이크=대우’라는 인식이 현지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와 협력하려는 현지 업체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 지난달 24일 루마니아가 추진 중인 소형모듈원전(SMR) 기본설계(FEED)에 한국 건설사가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삼성물산이 미국의 뉴스케일 등과 손잡고 루마니아 도이세슈티 지역에 위치한 석탄화력발전소를 462㎿(메가와트) 규모의 SMR로 교체하는 프로젝트의 설계를 맡게 된 것이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루마니아 SMR은 글로벌 SMR프로젝트 가운데 사업실행에서 가장 앞서가는 것으로 평가받는 프로젝트로, 유럽시장 진출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건설업계가 올해 들어 해외에서 굵직한 사업을 수주하면서 다시 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다. 국내 건설 경기가 공사비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해외시장에선 굵직굵직한 낭보가 잇따르고 있다. 국토교통부와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건설사들은 해외 79개국에서 296건, 총 155억8000만 달러(약 21조2300억원)의 수주고를 올렸다. 미국 건설·엔지니어링 전문지인 ENR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수주액 기준으로 중국·프랑스·스페인·미국에 이어 세계 5위를 자랑한다.
1965년 태국 고속도 건설로 첫 진출
하반기에도 수주 전망이 밝은 굵직한 사업이 많아 연내 해외건설 누적 수주액 1조 달러(약 1363조원) 달성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누적 수출액 1조 달러를 달성한 품목·업종은 2018년 반도체, 올해 3월 자동차 뿐이다.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건설로 해외시장에 첫 진출한 K건설은 그동안 뚝심과 난도 높은 공사를 수행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왔다. 세계 최장 현수교 튀르키예(터키) 차나칼레대교(2018년 DL이앤씨, SK에코플랜트), 세계 최초 빌딩형 차량기지인 싱가포르 T301(2016년 GS건설) 등이 모두 K건설의 작품이다.
초고층 등 난도 높은 건물 시공도 세계에서 첫 손에 꼽힌다. 높이 828m로 세계 최고층 빌딩인 아랍에미리트 부르즈 칼리파 타워(2004년 삼성물산)를 비롯해 52도 기운 비정형 건물인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2008년 쌍용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최원철 한양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세계적 랜드마크 건물을 한국 건설사들이 만든 것은 그만큼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내는 능력이 있고, 힘들어도 묵묵히 해내는 뚝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체코 원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역시 국내 건설사의 글로벌 경쟁력이 긍정적 평가를 끌어내는 바탕이 됐다는 후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과거 사막이라는 가혹한 조건에서도 약속한 납기를 맞춘 건설 경쟁력을 체코 정부가 높이 샀다”고 전했다. 이른바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예정대로 준공)’은 K건설의 기본 원칙이자 강력한 무기로 꼽힌다. 실제 1970년, 사우디아라비아 제2 도시인 제다시 현대화 사업 당시 전쟁 여파로 전기가 끊겨 공사 중단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시공사 삼환건설은 준공일을 맞추기 위해 횃불을 밝혀두고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차희성 아주대 건축학과 교수는 “한국 건설사는 다른 해외 기업에 비해 성실하게 계약을 수행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말했다.
품질로도 인정받고 있다. 2006년 아시안게임 당시 널리 회자된 카타르 도하 쉐라톤호텔이 하나의 좋은 예다. 당시 이례적인 폭우로 아시안게임 경기장에 비가 스며들어 경기 진행이 어려워지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중국이나 중동 기업이 저가 경쟁력을 앞세워 수주한 신축 건축물에서 특히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 반면 1979년 현대건설이 공사를 맡았던 카타르 도하 쉐라톤호텔은 멀쩡했다. 이는 카타르의 건설 공사 발주 기준을 바꾸는 전환점도 됐다.
현대건설 측은 “도하 아시안게임 이후 카타르는 가격보다 품질에 무게를 두고 건설업체를 선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웠고, 우리 기업들이 현재까지 카타르의 수많은 공사를 수주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고 전했다.
해외건설 텃밭은 예나 지금이나 중동이다. 중동 지역은 올 상반기에도 수주액의 64%를 차지했다.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로부터 60억8000만 달러 규모의 가스 플랜트 공사를 수주한 삼성E&A가 대표적이다. 해건협 관계자는 “최근 규모가 큰 사우디 건을 수주하면서 중동 비율이 부각됐지만, 북미나 유럽 등 여러 지역을 통해 프로젝트 다각화를 진행하고 있어 우려할 부분은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 최근 북미·유럽·태평양 지역에서의 약진이 눈에 띈다. 해건협에 따르면 북미·유럽·태평양 비중은 2020년 6.2%에서 지난해 37.3%까지 급성장했다.
최근 유럽의 원전과 북미의 도로공사 등의 수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2월 135억 달러 규모의 불가리아 코즐로듀이 원전 우선협상자로 선정됐고, GS건설은 호주 멜버른 도로공사에 참여해 31억 호주달러(약 2조7000억원) 규모의 민관합작투자사업(PPP)을 수행 중이다. GS건설 관계자는 “기술력은 물론 해외에서 자금조달 능력까지 인정 받은 수주여서 더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한국 경제 떠받치는 수출효자 한몫
전문가들은 K건설이 앞으로도 한국경제를 떠받치는 수출 효자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본다. 국토연구원은 최근 ‘해외건설 1조 달러 시대를 위한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해외건설을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본격 추진하는 단계’라고 평가했다. 김지연 책임연구원은 “4기 해외건설 수주액은 평균 304억8551만 달러로 3기(440억4333만 달러)와 비교해 감소했지만, 다양한 정책과 제도가 도입되고 안정적인 수주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수주 텃밭인 중동에서 지정학적 위험이 고조되고, 중국과 튀르키예의 저가 수주로 인한 가격 경쟁력 약화 역시 K건설이 한 단계 도약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위기 속에서 시장 다변화에 나서고, 첨단 기술에 기반한 사업에 한국 건설사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서다. 한승헌 연세대 교수(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원장)는 “애플, 삼성이 초격차 기술로 초격차 제품을 생산해내는 것처럼, 초장대교량, 대심도 터널, 도심 지하철, 원자력발전소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술에 대해 K건설 초격차 상품으로 선정하고 이를 해외에 수출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K건설이 해외시장에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개발사업 비중이 낮다고 지적한다. 올 상반기 국내 기업의 해외사업 비중을 보면 여전히 단순 도급 사업이 91.8%에 이른다. 김화랑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부가 투자개발사업 확대를 통한 해외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과 지원 확대에 더 큰 관심과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균형 발전도 중요하다. K건설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올 상반기 해외시장에서 대형 상위 10개사의 수주 비중은 무려 97.2%에 달했다. 중소기업의 계약 비중은 2022년에는 21.5%였지만 지난해는 9.2%, 올 상반기에는 2.8%로 점점 둔화하는 추세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이 해외건설 강소기업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공동 프로젝트와 금융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환경 건설의 속도도 높여야 한다. 시장조사기관인 IHS마켓에 의하면, 올해 세계 건설시장은 전체 4.3% 성장하는 가운데, 친환경사업 확대가 예상되는 북미·태평양(8.5%) 중심의 성장이 전망된다. 손태홍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기술·관리연구실장은 “1조 달러를 넘어 2조 달러 시대로 지속가능 성장을 위해선 그린에너지 확대, 단순 도급에서 투자개발형 전환 등 양적·질적 성장이 가능하도록 전략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