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이 달아준 날개로, 인종차별 뛰어넘은 오언스

2024. 8. 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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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전설의 순간들
축구 감독 조제 무리뉴가 스포츠 전문채널 TNT와 인터뷰했다. 장소는 영국 런던의 웸블리 구장. 유럽축구연맹의 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이 열리는 곳이었다. 리오 퍼디낸드가 진행했다.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동료다. 무리뉴는 터키 리그 명문 페네르바체의 감독을 맡아 부임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라기보다는 질문 스무 개를 듣고 빠르게 대답하는 스피드 퀴즈 같았다. 인터뷰 동영상은 지난 6월 13일 공개됐다. 마지막 질문은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맨은 누구냐’는 것이다. 무리뉴는 뜸을 들인다.

나치, 베를린 대회 기간 인종차별 눈속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멀리뛰기에 출전한 제시 오언스. [사진 독일연방기록보관소]
“어려운 질문이다. 대답이 불가능할 정도다. 스포츠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인데, 그들은 역사를 만들었고 그 역사는 지워질 수 없다. 나는 제시 오언스라고 말하고 싶다.”

퍼디낸드는 “나 자신”이라는 대답을 원했을지 모른다. 무리뉴는 자신을 ‘스페셜 원’이라고 부르는 자기애 충만한 사나이니까. 그러나 무리뉴는 수많은 이유를 함축하고 거기에 신념을 투영했다. 정답에 가까운 훌륭한 답변이 아닐까. 오언스는 영원한 이름이다. 올림픽을, 특별히 베를린의 여름을 상징하는 인물로 우뚝하다. 스포츠와 올림픽은 역사를 담아내고 또한 드러내기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현대 올림픽의 전형을 수립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최초이자 최악의 사례로 남았다. 비판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종차별이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스웨덴, 체코와 네덜란드에서 보이콧 여론이 비등했다. 나치는 눈속임으로 넘어갔다. 유태인 식별 표지를 철거하고 차별을 중단했다. 그러나 악행은 올림픽이 끝난 뒤 재개되었다. 대회 폐막 이틀 뒤 나치 장교 볼프강 퓌르스트너 대위가 조상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퇴역했다. 선수촌 관리를 맡았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종주의가 베를린 올림픽에 얼마나, 어떻게 악영향을 미쳤는지 계량하기 어렵다. 나치가 세계를 속인 결과다. 속임수는 영원할 수 없다. 베를린 올림픽을 대회로서 역사에 남긴 선수들은 유색인종이었다. 가장 빠른 인간을 겨루는 경기, 그럼으로써 신을 찬양하는 단거리 경주와 멀리뛰기에서 금메달 네 개를 따낸 오언스는 흑인이었다.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 불굴의 유럽 정신을 표상하는 마라톤 우승자는 식민지 조선에서 온 청년 손기정이었다.

필자가 베를린 시 한스 브라운 거리에 있는 스포츠박물관에 갔을 때, 전시장 입구에 손기정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올림픽이 열렸을 때 주경기장으로 사용한 올림피아슈타디온은 내부의 한 층을 오언스에게 바치고 있다. ‘제시 오언스 라운지’다. 5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공간을 초콜릿색으로 장식했다. 오언스의 피부 빛이다. 베를린에는 오언스를 향한 애틋한 정서가 있다. 근원은 올림픽 역사에 남은 스포츠맨십과 인종·이념을 초월한 우정일 것이다.

1936년 8월 4일. 남자 멀리뛰기 예선 경기가 열렸다. 오언스는 하루 전 100m 경기에서 10.3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멀리뛰기에서도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예선 통과가 어려웠다. 1, 2차 시기에서 파울을 연발했다. 구름판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처음에는 제한선을 넘었고 두 번째는 너무 뒤에서 뛰었다. 오언스는 자신감을 잃었다. 3차 시기를 알리는 장내 아나운스먼트가 오언스를 재촉했다. 이번에도 파울이면 탈락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즈 오웬즈!”

제시 오언스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해준 루츠 롱(왼쪽)이 오언스와 대화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으며 오늘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는 독일 선수, 루드비히 루츠 롱이었다. 큰 키에 균형 잡힌 체격,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동자. 아돌프 히틀러가 사랑한 아리안 청년의 전형이었다. 가슴에 나치 십자가가 선명했다. 롱은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죠, 재즈 오웬즈?” 그는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유창하지는 않았다. “난 루츠 롱이에요. 뭐가 문제인지 알겠군요. 당신의 점프는 완벽합니다. 또 파울을 당할까 봐 두려운 거죠?”

오언스는 놀라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답을 알아요. 작년에 나도 같은 일을 겪었거든요.”

롱은 오언스에게 자신의 도움닫기 보폭을 확인하고 구름판 뒤쪽 끝에서 몇 인치 떨어진 곳에서 도약하면 파울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오언스는 이때 롱이 자신의 어깨에 둘렀던 수건을 구름판 뒤 점프해야 할 정확한 지점에 놓아 표시해 주었다고 증언했다. 롱의 조언과 도움은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오언스는 마지막 시기를 거뜬히 통과해 6명이 겨루는 결승에 진출했다. 오언스가 금메달을 확정하는 순간 롱이 가장 먼저 달려와 축하했다.

시상식 사진은 마음을 흔든다. 금메달리스트는 거수경례를, 은메달리스트는 나치식 경례를 한다. 동메달리스트인 일본의 다지마 나오토는 꼿꼿이 서서 국기게양대를 바라본다. 베를린을 밝힌 성화가 꺼지고 불과 3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세 청년의 조국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다. 시상대에서 내려온 오언스와 롱은 팔짱을 끼고 걸었다. 롱이 관중들을 향해 “제시 오언스!”를 외쳤다. 그러자 모두 오언스를 연호했다.

롱, 1964년 제정 ‘쿠베르탱 메달’ 첫 수상자
알려지기로는 히틀러가 흑인 선수의 우승에 비위가 상해 경기장을 떠났다고 한다. 영화 ‘레이스’(2016)에 이 일화가 나온다. 오언스의 기억은 다르다.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본부석 앞을 지날 때 히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언스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보도도 있다. 피츠버그 쿠리어의 기자 로버트 반은 1936년 8월 4일자 기사에 “나는 히틀러가 오언스에게 인사를 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고 썼다.

영화보다는 같은 해에 나온 다큐멘터리 ‘올림픽의 자부심, 미국의 편견’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릭 션크만이 역사 뉴스 네트워크 2002년 2월 13일자에 기고한 ‘아돌프 히틀러, 제시 오언스, 올림픽 신화’는 이 때의 일을 전한다. 히틀러는 1936년 8월 1일 독일의 수상자들만 축하하고 경기장을 떠나 비난을 받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앙리 드 바일레 라투르 백작은 히틀러에게 “모든 메달리스트를 축하하거나 아예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히틀러는 후자를 선택했다.

경기가 끝난 날 저녁 오언스와 롱은 선수촌에서 다시 만났다. 식사를 함께 하고 술잔도 기울였다. 둘은 친구가 되었다. 오언스가 미국에 돌아가면 서로 편지를 쓰기로 맹세했다. 두 사람은 약속을 지켰다. 전쟁 중에도 편지가 오갔다. 롱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 대학원을 마치고 함부르크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입영 통지를 받았다. 그는 1943년 7월 13일 시칠리아에서 전사해 그곳 독일 전몰자 묘역에 묻혔다. 마지막 편지가 남아 있다. 죽음을 예감한 듯하다.

“제시, 나 여기 있어. 마른 모래와 축축한 피만 있는 곳이야. 난 나와 너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 집에 있는 아내와 내가 아빠인지도 모르는 내 아들 칼을 걱정할 뿐이야. 아마 이게 내 마지막 편지일 거야. 부탁이 있어. 전쟁이 끝나면 독일에 가서 내 아들에게 아빠에 대해 말해줘.”

1951년, 유럽에서도 전쟁의 상흔이 아물어갔다. 오언스는 독일을 방문해 친구의 아들을 만났다. 그는 말했다. “내가 가진 우승컵과 메달을 다 녹여도 루츠 롱의 우정에 도금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롱은 1964년 제정된 ‘쿠베르탱 메달’의 첫 수상자다. 쿠베르탱 메달은 올림픽 정신을 구현하고 스포츠맨십을 발휘한 선수에게 준다. 오언스는 골초였다. 1979년 12월 폐암 진단을 받고 3개월 뒤 죽었다. 66세였다. 시카고의 오크우즈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 이렇게 적혔다.

‘제시 오언스, 1936년 올림픽 챔피언’.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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