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 기다린 항일 저항시인, 17차례 체포돼 감옥서 순국

2024. 8. 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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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⑦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山脈들이
바다를 戀慕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犯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季節이 픠여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

저항시인 이육사.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생일에 서명을 담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사진이다. [사진 이육사문학관·김석동]
이육사의 유작 ‘광야(曠野)’의 4연은 일제에 저항하는 선구자적인 자기희생, 5연은 민족해방과 독립의 염원을 그렸다.

퇴계 14세손인 이육사 선생의 본명은 원록(源祿, 후에 원삼·源三)으로 1904년 경북 안동 도산면 원촌마을에서 이가호와 허길 부부의 6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퇴계 5세손인 이구(李榘)가 개척한 원촌마을은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배출된 곳으로 육사의 형제들도 독립운동에 깊이 참여했으며 육사의 외가 또한 항일투사 집안이다. 외조부 범산 허형은 의병장으로,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로 순국한 의병장 왕산 허위와 사촌간이다. 외삼촌 허규는 육사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었던 독립운동가이며, 외사촌 허은은 초대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의 손부다.

외조부가 의병장, 외가도 항일 명문가
육사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16년부터 신교육학교인 보문의숙에 다니다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해 1919년 1회로 졸업한다. 형제들과 함께 대구로 이사해 서병오 선생에게 서예와 그림을 배웠다. 그즈음 결혼해 영천 처가 인근의 백학학원에서 수학한 후 1923년 그 학교에서 9개월간 교편을 잡는다.

1924년 동경으로 유학을 가는데 ‘관동대지진(1923년)’ 여파로 조선인학살사건이 있은 후였고, 박열 등이 주도하던 무정부주의 운동단체 ‘흑우회’에 육사가 가입한 것으로 보아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로 보인다. 1925년 귀국해 독립운동가 서상일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대구에 세운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지 이정기, 조재만과 함께 북경을 다녀왔고 이듬해 중산대학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를 맞는다. 중산대학은 1924년 손문이 주도해 광동성 광주에 황포군관학교와 함께 세운 곳으로 중산은 손문의 호이다.

1946년 발간된 『육사시집』초판본. 필자소장. [사진 이육사문학관·김석동]
1927년 귀국했는데 그 해 10월 18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일제는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을 대거 검거해 조사했다. 육사는 형, 동생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장진홍이 검거된 후 1929년 5월까지 1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는데 이때 미결수번호가 264번이었다. 후에 이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했다. 장진홍은 이듬해 대구감옥에서 자결, 순국했다.

육사는 1930년 초에 첫 시 ‘말’을 이활(李活)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일제의 탄압에 맞선 투쟁의 의지가 돋보인다.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항일투쟁이 전국으로 파급되자 ‘대구청년동맹’ 활동으로 1930년 1월 다시 체포됐다 풀려난다. 이후 중외일보 대구지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 10월 이활,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했으니 바로 그의 수인번호인데 이후 육사를 한자로 ‘肉瀉(고기를 먹고 설사 한다)’ ‘戮史(역사를 죽인다)’라고 쓰다가 지인의 권유로 일제에 대한 자극을 비껴 ‘陸史’라 쓰게 되었다.

20대의 이육사(오른쪽). 사진 중 한복 입은 모습으로는 유일하다. 함께 찍은 사람은 동생 이원일과 친구 조규인이다. [사진 이육사문학관·김석동]
1930년 11월 일제 탄압에 항거하는 ‘대구격문사건’이 발생하자 배후로 지목된 육사와 중외일보에 근무하던 동생과 동료들이 체포되어 수개월간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린다. 부인이 옥중의 육사를 위해 하얀 솜옷을 넣어주면 피가 흥건하게 젖어 계속 갈아 넣어야 했다. 석방 후 육사는 만주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해 8월 문을 닫게 된 중외일보를 떠나 조선일보 지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1932년 조선일보에서 퇴직한 후 봉천(현재 심양)에서 의열단 창립 핵심인물인 윤세주를 만나 그의 권유로 의열단이 남경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군사간부교육을 받았다. 1919년 말 조직된 의열단은 요인 암살 등 의열투쟁을 전개했지만 조직적인 군사력으로 투쟁 방식 전환을 모색하고 1926년 지도급 인사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군사간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933년 4월 육사와 처남 안병철 등 26명 전원이 정치·군사·특수전교육을 이수하고 졸업해 항일무장독립투쟁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졸업 후 국내 독립운동의 확산을 위해 비밀리에 귀국했으나 이듬해 3월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군사간부학교 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먼저 체포되어 자백한 연고로 졸업생들이 연이어 검거되었고 육사 역시 체포된다.

비밀리 활동, 기록 안 전해져 안타까워
이육사 탄생 100주년, 순국 60주년이 되는 2004년에 고향 안동에 문을 연 이육사문학관. [사진 이육사문학관·김석동]
수개월간 일제의 모진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자 육사는 다시 붓을 들어 시사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35년 봄 한국 현대시의 거장 신석초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하게 된다.

한편 그 해 5월 군사간부학교 동기생이 체포되면서 다시 경찰 조사를 받은 후 병원에 입원했고 병상에서 ‘황혼’을 쓰게 된다. 1936년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한 것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 후 석방되었고, 1937년 서울 명륜동으로 이사한다. 1939년에는 종암동으로 이사해 『문장』지에 ‘청포도’를 발표한다. 육사는 후일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민족이 익어가고 일본은 끝난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1940년 들어서는 ‘절정’ ‘광인의 태양’ 등을 발표했다. 1941년 둘째 딸을 낳아 ‘비옥하지 않다’는 옥비(沃非)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라’는 뜻이라 한다.

이렇게 193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인 문단생활을 하면서도 육사는 청년운동과 언론단체 활동에 참여했기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대상이 되었고 수시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문인들에게까지 일제의 압박이 거세어지면서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육사는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무렵 많은 문인들이 일제에 굴복해 친일대열에 합류했으나 육사는 오히려 본격 항일투쟁에 나서 북경행을 결심한다.

1943년 초 절친 신석초와 눈 내린 홍릉길을 걸으며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에 가려네” 결심을 토로했고 4월에 떠나고야 만다. 당시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합작 노력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돕던 육사는 국내 무력투쟁을 위한 국내 무기반입도 시도한다. 7월에 모친과 맏형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포승줄에 묶여 밀짚용수를 머리에 쓴 육사는 어린 딸 옥비를 청량리역에서 상봉하고 “아버지 다녀오마”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차디찬 북경의 일제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외롭게 순국했다. 늘 단정하고 깨끗한 외모를 갖추었던 그는 주옥같은 40편의 시와 소설, 수필, 평론 등을 남긴 문인이자 열일곱 차례 구금, 투옥되는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정신을 지킨 독립투사로 민족사에 영원히 이름이 남을 영웅이다.

항일독립운동은 속성상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터라 육사가 몸을 담았던 의열단, 신간회 등 독립운동단체에서의 활동기록 역시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유골은 동생 원창에 의해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0년 고향 원촌 뒷산에 부부 묘소가 마련되었다.

1946년 동생 원조가 『육사시집』을 출판했고 신석초 등은 서문에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육사는 저 세상에서도 분명 미진한 꿈으로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1968년 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탄생 100주년, 순국 60주년이 되는 2004년에는 고향 안동에 이육사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생가도 복원됐으며 따님 이옥비 여사가 함께 돌보고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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