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게 반기 든 사람들… 짧았던 ‘평양의 봄’
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사건
김재웅 지음 | 푸른역사 | 652쪽 | 3만3000원
1956년 8월 30일 평양의 내각 회의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상업상 윤공흠이 갑자기 발언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저는 우리 당내에 존재하는 개인 숭배와 그것이 불러온 악영향에 대해 토론하려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장내는 싸늘해졌고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적막감이 돌았다. “당과 국가의 권력이 한 사람의 수중에 장악돼, 당내 민주주의와 집단 체제가 훼손되고 법질서가 유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북한의 1인자 김일성 앞에서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측근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벌떡 일어났다. “이 개X끼! 내가 항일 투쟁할 때 넌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어.” 회의장은 들끓었다. “반당 종파분자를 끌어내려라!”는 고함이 난무했다. 토론은 중단됐고 윤공흠과 그를 옹호했던 최창익 등에 대한 대대적 역공이 시작됐다.
북한은 어쩌다가 지금 같은 1인 독재의 나라가 된 걸까. 북한 정치사 전공자인 저자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 틀어박혀 썼다는 이 책은 1956년 북한의 ‘8월 종파사건’(8월 전원회의 사건)을 해부한다. 우리에겐 북한의 정치 세력 중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된 사건 정도로 알려진 이 사건은 훨씬 더 큰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과 구소련의 원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것은 ‘북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김일성 1인 독재에 대한 반기(反旗)’였다고 해석한다.
해방 직후부터 계속된 개인 숭배의 폐해는 심각했다. 김일성 초상화가 인쇄된 신문으로 책을 포장한 사람들이 징역 5년형을 받을 정도였다. 이에 맞춰 김일성의 활동이 항일투쟁사의 중심인 것처럼 현대사를 왜곡·날조하는 일이 횡행했다. 1955년 곡물 부족분이 25만t에 달할 정도로 식량난이 심각했지만 중공업 우선 정책이 고수돼 인민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실무 능력 없는 이들이 간부 자리에 앉는 인사 정책의 실패도 계속됐다.
이 상황에서 옛 중국 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활동했던 연안파의 서휘·윤공흠·이필규 등이 소련파 일부와 협력해 김일성 비판과 권력 분산을 계획했다. 마침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와 1인 지배 청산 운동에 나선 상황이었다. 비판 세력은 8월 전원회의를 ‘거사’ 시점으로 잡았으나 소련파 남일이 김일성에게 밀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조차 회의 석상에서 이들의 비판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토론 대신 윽박지름으로 발언은 중단됐고, 주도자들은 평양을 탈출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소련과 중국이 특사를 파견해 김일성을 압박하자 관련자 처벌은 멈칫했고, 김일성은 “개인 숭배는 내가 아니라 (이미 숙청된) 박헌영이 저지른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1956년 말엔 지식층과 유학생이 체제를 비판하는 아주 짧은 ‘평양의 봄’이 이뤄졌다.
그 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반소(反蘇) 사태가 일어나고 중·소 분쟁으로 양국이 북한에 구애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57년 김일성은 ‘8월 종파 사건’이 체제 전복 사건이었다는 시나리오를 만든 뒤 대숙청에 들어갔다. 연안파의 원로이자 명목상 국가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은 시골 농장으로 내쫓겼다. 그가 과거 개성의 황진이 묘에 참배하며 ‘세상 제일의 여걸’이라고 했다는 행적조차 ‘반혁명적 언사를 내뱉은 죄’가 됐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건과 무관한 이들에게도 ‘반혁명’ 혐의를 뒤집어씌워 10만명이 넘는 ‘반혁명 분자’들을 색출했다. 옛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과 납북 인사 조소앙까지도 숙청 대상이 됐다. 이후 권력층엔 김일성 숭배자만이 살아남아 지금의 북한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책은 당시 반(反)김일성 세력을 ‘민주주의를 갈망한 혁명가’로 규정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이입 된 듯한 부분이 있어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김일성의 상식을 벗어난 리더십은 주목할 만하다. 비판을 들으면 자신은 잘 모르는 것처럼 딴청을 부리다가도 권위에 도전한 자들에게는 시간을 두고서라도 반드시 복수하고 숙청하는 ‘뒤끝 작렬’의 정치 행태를 보였고, 국내외 정세를 최대한 이용하며 아첨꾼들만 주변에 남게 했다. 그 자신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을지라도 그의 나라는 끝내 나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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