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왕따가 된 영국 클래식, 임윤찬 프롬스 데뷔에 반색
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영국 일간 가디언은 “스무 살 청년이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일까?”라는 프리뷰와 “스타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미묘함과 광채를 선사하다”라는 리뷰로 임윤찬을 연이어 다뤘다. 프롬스 보도자료 라인업에서 임윤찬 이름은 첼리스트 요요마,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바로 뒤에 있다.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일으킨 신드롬을 프롬스가 수렴해 본인 임기 마지막 업적으로 말하고픈 프롬스 운영감독 데이비드 피카드의 조바심이 읽힌다.
2020~21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춤했던 프롬스의 티켓 판매는 올해 2019년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외형상으로 프롬스는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으나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축제’를 표방한 내실은 그렇지 않다. 여름 기간 프롬스를 반드시 거치던 세계적 오케스트라들이 좀처럼 런던에 머무르지 않는다. 과거 양성 균형, 세계 초연을 장려하던 프롬스는 경영난으로 축제에서 이름을 빼겠다는 BBC의 엄포에 대응하느라 프로그램의 세부를 챙기기 어렵다.
본질적으론 BBC에 정부 재정을 투입하고 방송사가 이를 프롬스에 우회 지원하는 현행 영국 문화예술 지원 체계가 앞으로 유효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프롬스와 BBC 모두 해답이 마땅치 않다. 2022 BBC 프롬스 재팬, 올해 12월 개최 예정인 BBC 프롬스 코리아는 런던의 고충이 낳은 대안이다.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런던은 음악계 지도에서 밀려났고 추락하고 곤두박질치는 중”이라고 논평한다.
헨델과 하이든 이후 세계 클래식 시장의 허브로 군림하며 클래식물을 주도적으로 거래해온 런던은 2012년 EMI 폐업에 이어 2020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최종 서명으로 클래식계 ‘장’과 ‘망’의 기능을 크게 상실했다. 브렉시트 논의 초기 런던 대형 매니지먼트가 우려를 표명했듯, EU 탈퇴와 함께 영국이 경제적으로 유럽 단일시장에서 제외되면서 클래식 상품 교역은 구조상으론 1970년대 유럽경제공동체(EEC) 시절로 돌아갔다. 브렉시트 이후 코로나 사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보수당 정부의 지방 분권책으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내려왔다.
브렉시트 이후 런던 심포니, 로열 오페라, 프롬스가 내놓은 라인업 자체가 예전과 다르다. 베를린 필하모닉 장기 집권으로 영국 클래식의 상징이 된 영국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브렉시트 후폭풍으로 런던 심포니 전용홀 건립이 좌초되자 런던 심포니 음악감독에서 물러나 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떠났다. 각국 고급 인재가 영국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 래틀이 독일로 가면서 영국 클래식계의 이익을 외부에 대변할 대형 스피커가 사라진 셈이다. 로열 오페라에서 런던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안토니오 파파노가 과거 래틀이 하던 빅마우스 역할을 수행하긴 어렵다.
스타를 보유했던 런던의 대형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사는 소속 매니저들의 퇴사와 그들이 차린 부티끄 에이전시 성업으로 과거의 영화를 잃었다. 영국 오케스트라 협의회는 브렉시트, 전염병 위기, 러-우 전쟁을 화두로 대응책을 공동으로 모색하지만, 과거처럼 적은 개런티에도 런던을 찾았던 명성 있는 연주자를 다시 부르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EU 탈퇴로 외교적으로 외톨이가 된 영국 정부 처지 그대로 유럽 시장에서 영국 악단은 왕따 신세다. 음반 제작과 영문 일간지 리뷰로 아티스트가 무형의 이익을 쌓으며 런던이 ‘클래식 수도’를 자처할 때, 이를 고깝게 바라보던 독일, 프랑스, 베네룩스 시장은 런던의 몰락을 방관하고 즐긴다. 영국 클래식계가 브렉시트로 얻은 이익은 보이지 않는다.
잉글랜드 쇠락을 반기는 측은 영국 안에도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당(SNP)은 2015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좌절됐으나 2016년 국론이 브렉시트로 결론나자, SNP 당수 니콜라 스터전은 2019년 파리 필하모니와 파리 오케스트라를 방문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유대 강화를 선언했다. 영-불이 아닌, 스코틀랜드-프랑스가 에딘버러 페스티벌과 파리 필하모니를 축으로 친선을 나누자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지난 7월 총선에서 SNP는 참패했지만, 브렉시트를 스코틀랜드 독립 논의의 분기점으로 삼으려는 ‘잉글랜드 패싱’ 전략은 스코틀랜드의 소프트 분야에서 더 정교해질 것으로 보인다. 런던 프롬스는 가지 않지만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향하는 유럽 저명 악단이 등장한다면 SNP 전략은 결실을 맺는다.
스타머 정부 ‘팔길이 원칙’ 지킬지 주목
지난 7월 총선에서 압승한 영국 노동당과 당수 키어 스타머가 이끌 영국 내각이 과거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 시절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이념을 문화 예술 정책으로 계승할진 의문이다. 각종 정책을 발현할 영국의 여건과 환경,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발표 2022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이 7만6000달러를 넘었지만 영국은 4만8000달러 수준이다. UN 발표 평균수명에서 영국은 몰타, 슬로베니아를 가까스로 제친 세계 29위권이다. ‘지원하지만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21세기에도 금과옥조의 대전제로 가져갈지는 스타머 정부의 판단에 달렸다. 기관 편의와 국민 향유 증대 사이에서, 예술성이 뒤처지면서도 국가재정을 꾸준히 축내고 있는 단체를 얼마나 정리할 것인가의 과제가 스타머 앞에 놓였다.
무엇보다 런던이 바뀌지 않으면 영국 클래식의 미래는 없다. 클래식 음악을 ‘엘리트의 음악’으로 설정하고 런던 심포니 연주력을 세계 4위로 평가한 영국 잡지 그라모폰 리뷰를 동아시아 수출의 동력으로 삼던 얄팍한 상술로는 런던의 경관을 바꾸기 어렵다. 사우스뱅크와 바비컨센터의 낡은 외관이 자아내는 제한적인 청각적 경험으론 더 이상 새로운 세대가 클래식에 접근할 수 없다. 런던 클래식의 핵심인 런던 필하모닉과 필하모니아의 사우스뱅크 정기 연주회 축소를 대체하는 공연은 영화 시사회와 필름 콘서트다. 혁신을 가져올 새로운 콘서트홀이 지어지지 않는다면 런던 클래식 시장의 회복은 요원하다.
궁극적으론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고안한 보조금 형태로 영국 예술위원회에 의존했던 단체들이 정부 재정에서 자립하느냐에 영국 클래식 시장의 성패가 달렸다. 해답은 멀지 않다. 임윤찬과 같은 세계적 클래식 연주자의 실내악 가치를 먼저 알아본 위그모어홀과 ‘젊은 위그모어홀’에 도전하는 킹스플레이스의 경영 방식이 그것이다. 로열 오페라 시즌권을 구매하는 부유층과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는 관광객 수입 사이에서 이들이 집중한 건 영국 중산층이다. 적절한 티켓가격 설정과 흡족한 음향 환경이 유인하는 중산층의 반복 구매는 우리 클래식계도 주목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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