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50년 수집의 결정... 피켓팅 성공하면 공짜로 누린다

유주현 2024. 8. 3.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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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첫 빈티지 오디오 박물관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씨(야쿠쇼 코지)는 공중화장실 청소라는 궂은일을 하면서도 행복하다. 그의 하루하루가 완벽하기 때문인데, 완벽한 하루를 이루는 필수적인 의식이 있다. 출퇴근길 작은 봉고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과 점심 휴식 때 신사에서 ‘코모레비(木漏れ日·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를 누리며 그걸 필름 카메라로 찍는 일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아날로그한 일상이다.

빈티지 카메라·뮤직박스 등 볼거리 다양
오디움의 시그니처 공간인 라운지. 구마 겐고가 디자인한 압도적인 실내공간에 웨스턴 일렉트릭의 미러포닉과 희귀 LP 10여만장이 전시되어 있다. 박종근 기자
히라야마씨의 뮤지엄 피스 같은 행복의 단편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 서울에 생겼다. 지난 6월 서초구 내곡동 청계산 아래 들어선 ‘오디움’이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한 세계 최초 빈티지 오디오 박물관이다. ‘코모레비’를 건축화시킨 공간에서 100살쯤 먹은 빈티지 스피커가 토해내는 구수한 음향을 들을 수 있으니, 히라야마씨도 오고 싶을 법하다.
통로에 전시된 축음기들. 박종근 기자

1877년 축음기 발명부터 1960년대 오디오 전성기까지의 시간여행이다. 오디오 역사에 방점을 찍은 빈티지 시스템 300여 세트와 뮤직박스 27점, 희귀 LP 10만여 점 등,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이 열광할 귀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50년 오디오 덕후력을 자랑하는 KCC 정몽진 회장과 오디오 전문가 고 최봉식씨가 깨알같이 수집한 컬렉션이다. 개관전 ‘정음:소리의 여정’과 특별전 ‘수집과 기록’이 진행 중인데, 사진전인 ‘수집과 기록’ 전시실에는 또 다른 소장품인 빈티지 카메라 700여 점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히라야마씨의 세계관을 ‘플렉스’했달까.
1927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에 사용된 혼스피커 16-A의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5전시실. 박종근 기자
이 세계관을 열어주는 건 구마 겐고의 건축이다. 자연에 녹아들기를 추구하는 그의 건축철학대로, 불규칙한 두께와 길이의 알루미늄 파이프 2만 개가 감싸고 있는 외관은 ‘코모레비’ 자체다. 말하자면 이곳은 대나무숲이다. 코모레비로 뒤덮인 자연상태와 같은 공간에서 좋은 소리를 들어보라는 뜻이 담겼다. 입구가 건물 전면이 아니라 후면의 지하 2층 높이에 있는데, 깊은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느낌으로 만든 계단 아래엔 실제로 아담한 대나무 정원이 있다.
특별전 '수집과 기록' 전시실에는 오디움 소장품을 찍은 사진작품들과 700여대의 빈티지 카메라 컬렉션이 장관을 이룬다. 박종근 기자

내부로 들어오면 편백향이 은은하다. 알래스카에서 공수한 편백나무로 울퉁불퉁 마감한 벽면은 흡음력을 높이면서 자연의 따뜻한 느낌을 준다. 9m나 되는 층고도 자연의 소리를 위해서다.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한 오디움 외관. [사진 오디움]
1전시실에서 JBL 파라곤·알텍 랜싱·마란츠·매킨토시 등 1950~60년대의 가정용 하이파이 오디오들이 손님을 맞는다. 어린 시절 부잣집 거실에서 보던 커다란 스피커와 진공관 앰프가 박물관 신세라니, 그 시절 귀한 줄 모르고 듣던 아날로그 음향의 매력이 새삼스럽다.

2전시실부턴 오디움을 운영하는 ‘서전(西電)문화재단’의 명칭 그대로,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 제품 위주다. 독일 클랑필름 제품도 꽤 있다. 1920~30년대 초반 두 회사의 치열한 경쟁으로 오디오 산업이 발전해서 그렇다. 빈티지 오디오 중에서도 가장 귀한 당시 모델을 다 끌어모은 듯한 컬렉션이다.

JBL 파라곤(가운데) 등 1950~60년대 가정용 하이파이 오디오를 볼수 있는 1전시실. 박종근 기자
웨스턴은 영화산업 초기 극장용 오디오로 유명한데, 1927년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에 사용된 혼 스피커 12-A, 13-A도 오디움에 있다.

5전시실에서는 커브 혼 16-A가 원형 그대로 노래까지 들려준다. 높은 벽에 걸린 뒤주만한 스피커 3대가 쏟아내는 토니 오말리의 ‘마이웨이’가 ‘심쿵’의 경지다. 미국 오디오를 발전시킨 게 영화라면, 독일 오디오는 정치가 견인했다. 1930년대 나치가 대중선동에 필요한 라디오, 스피커 산업을 적극 후원할 때 성장한 게 클랑필름이다.

2전시실에선 미국의 자랑 웨스턴과 히틀러가 사랑한 클랑필름의 음향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레날도 안의 ‘클로리스에게’를 소프라노 수잔 그레이엄의 목소리로 차례로 들려주는데, 웨스턴의 따뜻하고도 명징한 소리에 비해 클랑필름은 다소 둔탁하고 거친 소리가 났다. 김영진 운영지원실장이 “워낙 오래된 기기라 컨디션을 맞춰 놔도 가끔 이런다”고 설명했지만, 오디움의 은근한 웨스턴 편애가 느껴졌다.

‘코모레비’를 형상화한 알루미늄 파이프 2만여개가 내외관을 감싸고 있다. 박종근 기자
4전시실은 녹음실처럼 꾸며놨다. 1940년대 라디오 방송국에서 쓰던 최고 성능의 스튜디오 모니터용 라우드스피커인 웨스턴 757A가 들어앉아 있다. 6전시실은 거리 유세 등에 쓰였던 1920년대 스트레이트 혼 스피커를 모아놓은 공간. 쭉 뻗은 혼이 소리 왜곡이 적어 공공장소의 군중에게 호소하기 좋았다고 한다. 음악감상용은 아니라지만, 웨스턴 11-A에 우퍼 등을 조합해 들려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썩 울림이 좋았다.

7전시실은 오디움 컬렉션의 시작점인 고 최봉식씨를 기리는 방이다. 정몽진 회장의 오디오 스승으로 알려졌다. 여기선 달팽이 모양의 커브 혼 여러 대가 앞태 뒷태를 각자 뽐내고 있는데, 음악이나 영화 사운드의 광대역 재생을 위해 4m 이상으로 길어진 혼을 제한된 공간에 배치하기 위해 달팽이 모양의 커브 혼이 탄생했다. 백지영의 ‘무시로’를 들려주는 1926년산 커브 혼 12-A와 13-A는 전체 생산량 50여대 중 14개가 여기 있다고 하니, 과연 세계 최대의 웨스턴 컬렉션이다.

웨스턴 11-A로 듣는 김광석 노래 큰 울림
옛날 오르골을 모아놓은 뮤직박스 전시도 볼거리다. 오디오가 없던 시절 음악회에 가지 않고 저렴하게 음악을 듣기 위해 탄생한 기계악기인데, 벽시계 모양, 새장 모양 등 각양각색이다. 동전을 넣으면 저절로 건반이 눌러지며 연주하는 피아노는 19세기 기술로 요즘 나온 AI 자동연주 피아노 뺨을 친다.

엑시트 갤러리에서 볼수 있는 뮤직박스들과 초기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박종근 기자
아날로그 시대로의 시간여행에서 돌아오려면 새하얀 얼음궁전을 거쳐야 한다. 비틀즈 컬렉션 등 10만여 장의 LP가 빼곡한 라운지는 하얀 부직포를 꽃처럼 접어 기둥과 천장 전체를 감싼 압도적인 비주얼로 오디움의 시그니처 공간이 됐다. 벽쪽에 파이프오르간 같은 거대한 오르골이 놓인 무대(?)에서 지휘자 인형의 지휘에 맞춰 27가지 악기가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려준다. 양옆을 지키는 건 웨스턴을 대표하는 극장용 스피커 ‘미러포닉’이다. 원음을 거울처럼 재생한다는 뜻이라는데, 100년전 3000석 극장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던 부드러운 음향이 소프라노의 아리아를 오페라 극장처럼 입체적으로 들려준다.
라운지에는 비틀즈 컬렉션 등 희귀 LP 10여만점이 빼곡하다. 박종근 기자

오디움이라는 타임머신은 무료다. 주 3일(목·금·토)만 열리고, 하루 5타임 25명씩만 사전 예약으로 받으니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이 관문만 통과하면, 히라야마씨 부럽지 않은 ‘퍼펙트 데이’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하는 덕질도 있는 법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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