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심경이 포착한 기호

2024. 8. 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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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일들’ 시리즈 가운데. 2017년 ⓒ유석
비스듬히 닫힌 맨홀뚜껑, 보도블록 위에 흩어진 돌 부스러기. 등 닿는 부분이 헤진 지하철 의자 등받이, 쓰레기 분리수거함 앞 비둘기 한 마리, 벽의 갈라진 틈새에 덧바른 시멘트…. 읽어도 그 안에 어떤 함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문장들처럼, 여기 ‘아무 것도 아닌’ 대상들이 담겨 있는 일련의 사진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라는 사진 제목처럼 평범한 사물과 현상이 찍혀 있을 뿐 극적이거나 결정적인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지극한 일상성만이 가득하다. 심지어, 쓸모없거나 버려진 것,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러자, 역설적으로 자꾸만 의미를 찾게 된다. 사진 속 사물들 사이 어딘가에 숨겨진 의미나 감춰진 작가의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 하며 사진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가 의미 있다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가치 있는가? 무의미한 것은 정말 쓸모없는가? 정말로 그러한가?’ 사진 작업 시작에 했던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겪은 사회적 사건 하나와 사진가 유석이 홀로 겪은 개인적 사건이 합쳐진 지점에서 시작된다. 2014년. 그해 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고, 작가는 난데없이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안과 밖의 절망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서초동 법원 앞을 걷다가 보도블록 위에서 ‘부러진 화살표’를 보았다. 맨홀뚜껑이 비스듬히 닫혀, 반듯이 뻗어나갔어야 할 방향표식이 손상되어 있었다. 아마도 당시 그의 심경이, 일상의 풍경에서 그 기호를 포착케 했을 것이다.

마치 화살표가 지시라도 한 것처럼 부러진 것들, 헤지고 눈 밖에 난 것들, 쓸모없다 버려진 것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다. 3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된 시리즈는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라는 제목의 전시와 사진집으로 묶였고, 유석을 사진 세계로 이끈 사진가 김홍희는 “지루하고 남루한 일상의 버려지고 폄하된 이미지들을 동원해, 의미와 무의미를 제재하거나 제한하는 어떤 거대한 것에 대한 돌팔매질”이라며 찬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유의미한 전복이었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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