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부터 9·11까지…미, 안보 위기 땐 방첩망부터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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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세계 최강 미국 방첩 정보전
정보전은 상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공격과 이를 막는 방첩으로 나눠진다. 축구의 공격·수비와 같다. 아무리 공격을 잘해도 수비를 못해 많이 실점하면 게임에 지는 것처럼 정보도 공격만큼 수비가 중요하다. 그래서 손자병법도 방첩에 실패하면 국가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세기 들어 미국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자 주요국들의 정보공격이 이어졌다. 먼저 독일이 공격했다.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독일은 연합국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미국이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미 전역의 군수창고를 파괴하는 정보전을 감행했다. 대표적 사건이 1916년 7월 30일 발생한 ‘블랙톰 파괴공작’이었다. 독일 정보당국이 미국 뉴저지주 블랙톰 섬에 있는 군수창고를 폭발시킨 사건으로, 피해액만 4억 달러(현재 가치)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미국의 방첩 정보전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방첩의 중요성을 깨달은 미국이 1917년 간첩법(Espionage Act)을 제정해 외국 스파이를 처벌할 수 있는 입법을 최초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즈음 유력국가들의 대미 정보전은 더욱 심했다. 나치 독일은 1936년 ‘독일계 미국인 연맹’을 설립해 미국의 전쟁 참여 반대와 나치 이념을 적극 전파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미국 공산당(CPUSA)을 이용해 정치·군사정보 수집은 물론 노동계·학계·문화계에 침투해 공산주의를 전파했다. 일본도 미국 정치인과 언론인들에게 금전적 대가를 제공하며 친일 여론 조성을 요구하는 등 로비가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유력국가들의 대미 영향력 정보전은 이념 공세, 정치인 매수, 여론 조작 등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의 독일 스파이망 일망타진 사건도 미국 방첩 정보전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일명 ‘듀케인 스파이망’ 사건으로, 1938년 히틀러가 전쟁 승패의 관건인 미국의 움직임을 정밀 파악하기 위해 듀케인 등 대규모 스파이망을 미국에 침투시켰다. 그런데 이 작전에 참여한 독일계 미국인 세볼드가 FBI에 이 사실을 밀고했다. 극비정보를 입수한 FBI는 3년간 추적해 1941년 6월 28일 무려 33명에 달하는 대규모 독일 스파이망을 적발했다. 미 역사상 최대 스파이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미국의 방첩전이 국내를 벗어나 국제적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으며,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됐다는 점이다. 나치의 대규모 스파이 활동에 분개한 미국 여론이 전쟁 참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의 극비 핵무기개발 사업에 침투한 소련 스파이망 적발 사건(중앙SUNDAY 2023년 9월 2일자)은 미국의 내부 방첩제도 개선에 획기적 역할을 했다. 이 사건에서 소련에 극비정보를 넘겨준 간첩들이 대부분 미국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미국은 내부 방첩제도를 대폭 손질했다. 공무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해 공산주의 연루자는 공직에서 배제하고, 비밀정보의 등급도 특급비밀(Top Secret), 비밀(Secret), 보안(Confidential) 등으로 세분화해 핵심 기밀 보호에 역점을 두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주미 외교공관들이 미국을 긴장시켰다. 일부 국가들이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악용해 공격적인 정보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가령 소련대사관은 미 국무부 건물에 극초단파를 쏴 도청을 시도했고, 쿠바대사관은 자국 교민들을 이용해 공공연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이에 미국은 1978년 국제적 불문율을 깨고 외교공관도 감시할 수 있는 해외정보감시법(FISA)을 제정했다. 이 법이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들도 은밀히 그렇게 하고 있다’며 일축했다. 이로써 미국은 성역없이 방첩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완비했다.
그러나 미국의 방첩 정보전은 시련도 많았다. 무엇보다 FBI가 극단세력에 의한 사회 혼란을 막는다며 실시한 코인텔프로(cointelpro) 작전이 심각한 역풍을 몰고 왔다. 대표적 사건이 흑인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감시였다. FBI는 이 작전 일환으로 킹 목사를 감시하는 과정에서 혼외관계 사실을 알았고 이를 언론 등에 공개했다. 킹 목사의 도덕성과 리더십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사생활권 침해, 인종차별 등 큰 논란을 불러 와 정보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미국 방첩사의 참극인 9·11 사태도 예상치 못한 시련을 안겼다. 당연히 용인될 줄 알았던 테러 용의자에 대한 고문이 국내외적으로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미국 당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과도한 고문은 국제인권 규범을 벗어난다는 비판이 당국의 예상보다 훨씬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련을 통해 미국은 개인의 존엄을 무시한 과도한 정보활동은 여론의 반발을 불러와 오히려 정보역량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이 교훈을 토대로 정보윤리를 강화해 정보활동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기회로 삼았다. 9·11의 아픔도 방첩정보전의 패러다임 개혁 기회로 활용했다. 9·11 이후 국가방첩관(NCIX), 국가방첩안보센터(NCSC), 국가방첩정책위원회(NCIPB) 등을 신설을 통해 방첩 정보전의 집행, 관리, 평가를 체계화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그렇다면 향후 미국의 방첩 정보전은 어떤 모습을 띨까. 도전받고 있는 미국의 패권 방어를 위해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외부의 정보공격을 사전에 와해시킬 수 있도록 강력한 방첩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내일의 미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나, 2022년 미 국가정보장실(ODNI)이 외국의 대미 영향력 정보전을 능동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해외 악성영향력 대응센터’(FMIC)를 신설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미국의 방첩 정보전이 강화될 경우 우리의 대미 정보활동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미동맹은 정보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산이므로 동맹급 방첩 협력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정보분쟁 발생시 불필요한 논란이 일지 않도록 수면하에서 지혜롭게 조정하는 메커니즘도 포함돼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동맹의 온정주의에 기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사례가 교훈을 제공해 준다. 과거 이스라엘 모사드는 FBI의 대(對) 이스라엘 전담조직 전화번호까지 파악했던 적이 있었다. FBI가 모사드에 대해 방첩 정보전을 펴는 동안 모사드도 자신들을 쫓고 있는 FBI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추적당하는 자가 오히려 추적하는 자를 추적한다’(The hunted are tracking the hunters)는 말까지 나왔다. 정보는 동맹보다 국익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준 말이다.
정보활동은 현장 요원들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도개혁이 뒷받침돼야 한다. 어떤 개혁이 뒷받침돼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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