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폭에 담은 역사만 350종…"국가대표 마음으로 만들죠"

신수민 2024. 8. 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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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표 역사 140년…29년차 우정사업본부 디자이너 박은경
“3㎝ 작은 화폭에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모습들을 최대한 담아내고 싶었어요.”

가로 26㎜, 세로 36㎜.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그마한 우표지만 그 안에는 140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발자취가 곳곳에 담겨 있다. 1884년 우정총국(지금의 우체국)이 설립된 지 올해로 140주년. 그동안 발행된 우표는 총 3773종에 달한다. 마침 지난 1일은 1895년 국내에 빨간 우체통이 처음 세워지면서 근대식 통신 제도인 우편 업무가 본격화된 날이기도 했다. 특히 올해는 한국·그레나다 수교 50주년을 맞은 지난 1일 양국이 함께 수교 기념우표를 발행해 그 의미를 더했다.

2017년 제작한 ‘신비로운 우주 이야기’ 우표를 소개하고 있는 박은경 우정사업본부 디자이너. 그는 “앞으로도 새로운 소재를 발굴해 우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여 가겠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이번 기념우표의 디자인은 박은경(54) 우정사업본부 디자인랩실 디자이너의 작품이었다. 1996년 입사 후 29년째 우표 디자인이란 한 우물을 파온 그가 지금까지 제작을 도맡은 우표만 350종이 넘는다. 올해 갑진년 연하우표도 그의 디자인을 통해 세상이 나왔다. 한 세대 동안 대한민국 역사를 작은 화폭에 담아온 ‘우표 디자인 베테랑’을 세종시 작업실에서 만나봤다.

명산 시리즈 땐 등반하느라 무릎 다 나가

Q : 어떻게 우표와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A :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뒤 광고회사에 다녔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우정사업본부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게 됐어요. 원래 중고생 때부터 엽서 마니아였거든요. 멋진 엽서에 어울릴 만한 예쁜 우표를 찾는 게 취미였다 보니 어릴 적부터 우표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죠. 그렇게 인터넷이 등장한 초창기 시절인 1996년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하게 됐습니다.”
1884년 최초로 발행된 5문 짜리 우표. [사진 우정사업본부]
1884년 최초로 발행된 10문 짜리 우표. [사진 우정사업본부]
왜 굳이 우표였을까. ‘세상을 담기엔 너무 작지 않냐’는 질문에 박 디자이너는 “고2 등하교 때 88 서울올림픽 기념우표에 그려진 성화를 본 뒤 마음속 불씨가 활활 타는 걸 느꼈다”고 회고했다. “우표는 평면인데 그 안에 있는 선수들의 역동적인 모습은 너무나 입체적인 거예요.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표의 흡입력과 전달력은 크기와 반비례한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은 거죠.”
2005년 지리산의 여름을 담아 제작한 명산 시리즈 우표. [사진 우정사업본부]
우연의 일치였는지 그는 입사 후 1년 만에 대형 스포츠대회 우표 제작을 맡게 됐다. 제2회 부산동아시아경기대회 기념우표였다. “보통 입사 2~3년은 지나야 디자인 업무가 주어지는데 선배가 갑자기 퇴사하면서 덜컥 제가 담당하게 됐어요. 당장 서울올림픽 기념우표가 떠올랐고, 그때 느낌을 되살려 부산 대회 우표에도 성화를 등장시키면서 역동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Q : 스포츠 우표가 가장 고난도라면서요.
A : “3㎝ 안팎의 평면 종이에 선수들의 움직임과 속도감을 담아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의 시그니처 장면을 우표에 담고자 할 때 트리플악셀이든 더블악셀이든 다 똑같아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운동선수의 박진감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밤도 숱하게 새야 했습니다.”
2019년 박은경 디자이너가 기획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우표. [사진 우정사업본부]
그와 동시에 그는 정확성을 높이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작아서 안 볼 것 같지만 우표도 민원이 꽤 들어옵니다. 붉은색 부리의 조류를 그린 우표를 보고 원래 노란색인데 잘못 그렸다고 지적할 정도였죠. 확인해 보니 크면서 부리 색깔이 붉게 변하는 새였습니다. 그 후로 랩실 디자이너들이 제작된 우표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몇 번씩 확인 작업을 거치고 있고, 저도 우표에 담기는 건 무조건 두 눈으로 직접 본 뒤 그리자고 결심하게 됐죠.”
지난 1일 발행된 한국· 그레나다 수교 50주년 기념우표. 현지의 유서 깊은 저택을 모델로 삼았다. [사진 우정사업본부]
2004년부터 5년간 발행해 큰 화제를 모은 ‘한국의 명산 시리즈 우표’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한라산을 비롯해 지리산·설악산 등 한국 주요 산의 춘하추동 사계를 우표에 담기 위해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에 올랐다. “말 그대로 ‘극한 직업’으로 치면 단연 1등일 정도로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네 발로 올라갔다 엉덩이로 내려오길 수없이 반복했죠. 하지만 우표에는 가장 잘 나오는 구도가 있기 마련인데 이건 직접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어요. 포기하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한국의 명산을 제대로 담아낸 우표를 보고 모두들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느끼도록 하겠다는 결심에 힘을 냈습니다.”
Q : 평소 산을 꽤 타셨나 봐요.
A : “전혀요. 첫 시리즈인 한라산 백록담이 제 인생의 첫 등반이었죠. 그때부터 산악인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웃음). 장비를 갖추고 산에 올라가면 보통 3박 4일씩 걸리곤 했죠. 백록담에서 작업을 마치고 하산할 때는 멀리서 누가 손을 흔들어서 저도 반갑게 인사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이 낭떠러지라 위험 신호를 보낸 거였어요. 명산 시리즈를 하면서 무릎이 다 나갔습니다. 그래도 산꼭대기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분명히 있어요. 그걸 우표에 담고 싶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우표. [사진 우정사업본부]
기념우표 중 빠질 수 없는 게 신년 연하장에 붙는 연하우표다. 올해 청룡의 해 연하우표도 직접 디자인한 그는 “이미 지난해 3월 디자인 작업을 마쳐 새해를 일찍 맞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며 “연하우표는 ‘새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우표와 달리 발행연도를 표기하지 않는 게 관례”라고 귀띔했다. 물론 긴급하게 제작되는 우표도 꽤 있다.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가 대표적이다. 이 우표는 취임식에 맞춰 발행돼야 하는 만큼 두 개 정도의 후보를 미리 제작해 놓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등의 검토를 거친 뒤 최종 확정하게 된다.

그가 특별히 관심을 집중하는 건 국가 기념행사 우표였다. “대외적으로 역사에 남는 기록물이잖아요. 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동시에 ‘변화’라는 측면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늘 똑같은 우표라면 큰 의미가 없지 않겠어요.” 그가 2019년 디자인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우표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독립기념관을 찾아가 서세옥 화가의 ‘만세도’를 두 눈으로 본 뒤 그 감동을 우표에 담자고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기존의 3·1운동 기념우표는 동상 등을 내세우다 보니 정적인 느낌이 강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그날의 뜨거운 함성을, 금방이라도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칠 듯한 생생한 모습을 우표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1983년 발행된 5000원짜리 호랑이 민화 우표. [사진 우정사업본부]
1884년 최초의 우표인 5문, 10문짜리 우표부터 액면가가 가장 비싼 5000원짜리 호랑이 민화 우표까지 우표엔 140년 근현대 역사의 흐름도 생생히 담겨 있다. 최근엔 사회상을 반영하듯 만화나 영화 등 문화 콘텐트도 우표 소재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Q : 만화가들 사이에서 ‘무서운 여자’로 불렸다면서요.
A : “1999년 만화 우표 시리즈를 제작할 때 저도 중간에 투입됐어요. 1990년대 국가 중점 육성 문화산업으로 만화가 각광을 받으면서 10년 장기 시리즈로 기획된 프로젝트였죠. 라이파이(김산호)부터 독고탁(이상무), 임꺽정(이두호), 영심이(배금택), 꺼벙이(길창덕), 맹꽁이 서당(윤승운) 등 평소 즐겨봤던 만화책의 작가분을 실제로 뵈어 제게도 뜻깊은 경험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우표는 만화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우표에 맞게 계속 수정을 거듭해야 했고, 그러면서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들로부터 ‘무서운 여자’라는 말도 듣곤 했죠(웃음). 그래도 나랏일이라며 흔쾌히 도움을 주신, 정말 고마운 분들이셨습니다.”
3·1운동 100주년 땐 함성 표현하려 노력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 채팅앱 등의 발달로 우표 수요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우표 판매량도 2018년 6769만 장에서 지난해엔 2556만 장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해외 주요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감소폭이 현격히 큰 편이다. 이는 그 어느 나라보다 디지털 문화가 강고하게 자리 잡은 우리의 사회상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140년을 이어온 우표와 손편지의 역사도 시대 변화의 급격한 흐름 속에서 ‘존재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Q : 우표의 미래와 관련해 우려의 목소리 등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A : “이메일과 각종 메신저 등이 보편화되면서 우편 이용률이 감소하고 우표 발행도 줄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손편지에 담긴 순수한 감정은, 봉투에 꼭꼭 눌러 우표를 붙일 때의 그 애틋한 마음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변함이 없지 않겠어요. 저 또한 이 작은 우표 한 장이 국가 기록물로 역사에 남는다는 점에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라는 각오로 우표 디자인에 더욱 매진할 겁니다.”

세종=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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