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한옥, 한식…미국에 세운 ‘작은 한국’

서정민 2024. 8. 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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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마을 ‘숲속의 호수’ 입주식
‘숲속의 호수’ 식당 겸 강당. 유병안 건축가는 “미국 목조주택 건축 양식과 자재를 썼지만 지붕의 실루엣, 회랑 기둥 등 한옥의 미학과 분위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 임희순]
지난달 20일 미국 미네소타주 베미지시에 있는 숲속에서 작지만 감동적인 잔치가 열렸다. 한국어 마을 ‘숲속의 호수’ 입주식이다. ‘숲속의 호수’는 1961년 시작된 비영리단체 ‘콘코디아 언어 마을’ 내 15개 외국어 마을 중 한국어 마을 이름이다. 여름방학 동안 2주 또는 4주 프로그램으로 미 전역에서 온 8~18세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역사를 가르친다.

모든 프로그램은 교실을 벗어나 자연과 일상에서 놀고, 먹고, 즐기면서 언어를 배우는 체험형+몰입형으로 진행된다. 함께 K팝을 부르고, 전래동화를 각색한 공연을 하고, 가야금·태권도·국궁·사물놀이 등을 배우는 식이다. 식사 때는 김치를 비롯한 한식을 먹고, 작은 상점에선 한국 과자와 물품을 산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한국어로 말하기는 필수.

올 여름 ‘숲속의 호수’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 [사진 임희순]
이날 행사가 뜻깊었던 것은 ‘숲속의 호수’ 첫 집들이였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25년째 매해 프로그램이 진행됐지만 번듯한 건물 한 채가 없어 옆 러시아 마을 시설을 빌려 썼다. 비영리 교육기관이라 모든 운영은 후원금으로 이루어지는데 수십 명의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기숙사·강당·식당 등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 마침내 오늘 ‘숲속의 호수’에도 기숙사 두 동, 강당 겸 식당 한 동, 사무실 한 동을 갖춘 번듯한 ‘집’이 생겼다.

이날 행사에는 캐서린 스티븐스(한국명 심은경) 전 주한 미대사 등 ‘숲속의 호수’에 애정이 각별한 150여 명이 참석해 집들이를 축하했는데 특히 감회가 남달랐던 이들이 있다. ‘숲속의 호수’ 창립자이자 1대 촌장인 로스 킹(브리티시 콜럼비아대 한국어 강의) 교수, 2대 촌장 다프나 주르(스탠포드대 한국문학 강의) 교수, 한국 기업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 그리고 유병안 건축가다. 마을 설립부터 지금까지 각별한 애정으로 ‘숲속의 호수’를 가꿔온 이들이다.

태권도에 빠져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다프나 주르 촌장과 유병안 건축가. [사진 임희순]
킹 교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며 “행사 동안 눈물도 조금 흘렸다”고 했다. 17년 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킹 교수는 “세계의 중심지인 미국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상징성이 큰 동시에 자연스레 ‘친한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며 한국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부탁했다. 출근길에 방송을 들은 박 회장이 킹 교수에게 즉시 만남을 청했고, 이후 지금까지 그는 사재 700만 달러(약 96억원)를 기부했다. 행사 당일 박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넓은 세상의 다른 문화와 언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숲속의 호수’가 젊은이들을 세계시민으로 육성하는 최고의 마당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전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우연히 한국어 마을 설립 이야기를 듣고 17년간 총 700만 달러(약 96억원)를 기부한 국내 기업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 [사진 임희순]
‘시몬느’ 자체 브랜드인 ‘0914’의 도산공원 앞 플래그십 스토어를 설계한 인연으로 7년 전 박 회장으로부터 ‘숲속의 호수’ 공간 설계를 부탁받은 유병안 건축가 또한 오늘이 특별하다. 그는 다른 나라 마을들이 비슷비슷한 2층 건물에 문양과 색깔로만 나라의 개성을 살린 걸 보고 ‘한국적인 공간’을 만들어 보자고 계획했다. “미국 땅에서 제대로 한옥을 짓는 건 물류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찾아낸 묘책이 미국 목조주택 건축 양식과 자재를 쓰되 한옥의 미학과 실용성을 현대적으로 접목하는 거였어요.” 대청마루부터 각 방까지 바람의 흐름이 원활한 한옥처럼 건물마다 맞창을 내고, ‘차경(외부 경치를 집안으로 빌려온다는 한옥 특유의 공간미학)’을 위해 건물 입구를 각각 비껴서 세웠다. 실내 바닥에는 온돌 시스템을 깔고, 건물 밖 복도에는 회랑처럼 기둥을 세워 종묘나 병산서원 만대루를 걸을 때 같은 한옥 특유의 공간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유 건축가는 “한옥을 진심으로 이해해야만 이 모든 게 가능하기에 시공 전 미국 파트너들을 초대해 안동의 한옥마을과 서원, 서울의 종묘 등을 보여주면서 한옥의 기본 철학을 설명하는 시간도 가졌다”고 했다.

킹 교수의 제자이자 ‘숲속의 호수’ 학생이었고 현재 10년째 2대 촌장을 맡고 있는 주르 교수는 “꿈이 이뤄졌다”고 기뻐하면서도 “한류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학생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30여 명의 스태프와 학생들을 위한 공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현재는 50여 명만 수용 가능)”며 안타까워했다. 여름뿐 아니라 일년내내 이 공간이 상설 운영되는 게 주르 교수의 새 희망이다. 사실 2차 청사진은 이미 있다. 기숙사 두 동을 더 짓고, 빈 공터에 광장을 만들고, 호숫가 앞에 진짜 한옥인 정자를 짓는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미국에 있는, 세계 유일의 한국어 마을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학생들이 더 많아질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의 참여를 기대해 본다.

■ 축하 노래 부른 김창완, 고기 대접한 류수영

류수영
“미안하고 고맙죠.” ‘숲속의 호수’ 행사에 참석한 가수 김창완씨와 배우 류수영씨는 “미국에 이런 한국어 마을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서 미안하고, 창립자도 촌장도 모두 미국인이라는 게 또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친분이 있던 캐서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와 다프나 주르 촌장에게서 각각 ‘숲속의 호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바쁜 일정을 쪼개 3~4일간 머물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마을 아이들과 친분을 쌓았다.

김창완
19일에는 김창완씨가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기타를 직접 연주하며 1시간30분이나 공연한 김씨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너가는 다리라고 생각한다”며 “그 다리를 놓아주려 25년간 애쓴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이제 한국에서 누구라도 나서야 할 때”라고 인사말을 전했다. 그는 또 외국인 아이들이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고 행복하다”고 했다. 실제로 김씨의 대표곡 ‘개구쟁이’ ‘안녕’ 등은 서정적이고 따듯한 노랫말 덕분에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노래라고 한다. 김씨는 공연 다음날 강당 입구 벽에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얼굴’이라는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다.

얼마 전 스탠포드 대학에서 한식 강의를 한 후 본격적으로 K푸드 전도사로 나선 배우 류수영씨 역시 3일간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다른 언어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놀이하듯 체험케 하는 교육 방식이 너무 좋다”며 “핸드폰 없이 어찌 지내나 했는데 오히려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된다더라. 나도 이렇게 영어를 배웠다면 지금 영어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웃음)”고 했다. 그는 또 “모든 스태프들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봉사하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내가 잘 하는 요리를 하기로 했다”며 “어제 점심에 만든 돼지갈비찜은 정말 폭발적인 반응이었다”며 뿌듯해 했다. 20일 행사 당일에는 초대손님들을 위해 ‘닭강정’ 350인분을 만들어 대접했다. 류씨는 ‘편스토랑’ 촬영팀 3명과 함께 왔는데 “이 방송이 나가서(11월 방영 예정) 더 많은 사람들이 ‘숲속의 호수’를 알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미네소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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