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화산책] ‘가장 나종’까지 지키고 싶은 老年의 일상
EU·일본 관련법 벤치마킹해서 노인의 삶 고립 없도록 도와야
일상 없는 삶은 공허하다. 축제와 이벤트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일상은 힘이 세다. 어떤 맹세와 다짐보다 단단하다. 그래서 일상이 위협받을 때의 충격과 공포는 무엇보다 크다. 차량 역주행 사고로 직장인들이 횡사한 광화문 골목은 언젠가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술잔을 주고받았던 곳이다. 그런 일상의 공간이 하루아침에 참사 현장이 되어버리니 황망함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어쩌다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위해, 사고 기사를 비롯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운전자의 경력이 몇 십 년이고 운전이 직업이니 “그럴 리 없다”는 추측은 먼저 제쳤다. 어떤 상황에서나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부정과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는 단정은 부질없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진짜’ 그 사람을 몰랐을 뿐이다. 인간이란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급가속 사고들의 다수가 휴먼 에러(Human error), 즉 사람의 실수로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오인 혹은 혼동한 것이라는 의견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학창 시절에 배운 언어철학을 거칠게 대입하자면, 혹 ‘급발진’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급발진’ 사고 자체도 없지 않았겠는가?
이른바 ‘급발진’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사고를 낸 운전자의 다수가 고령층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노인 혐오와 면허 강제 반납 주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혹스럽다. 지속적인 면허 자진 반납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82세와 81세, 두 명의 고령 운전자가 버티고 있는 우리 집만 보아도 그게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깥 세계와 국제 뉴스에 대한 무관심은 선진국이 되어서도 우리를 ‘특별히’ 불행하게 한다. ‘지방’이나 ‘시골’이라 부르는 지역에 대한 무관심은 대한민국의 문제를 서울 공화국에 가두어 해결하려 한다(그래서 결국 해결하지 못한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수도권과 달리 대다수의 지역은 자동차가 없으면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겪는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교육에서 배운 일상생활지원의 제1원칙은, 대상자의 ‘잔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대상자가 ‘스스로’ 생활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지역의 고령화가 위급한 상황에서 운전면허 반납은 곧장 노인들의 고립과 연결된다. 타인에게 의존해 무력해지는 노인들은 교통사고 이상으로 지역사회의 안전과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
사회적 대책을 강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어쨌거나 자구책은 마련해야 한다. 82세 아버지와 81세 엄마를 앉혀 두고, 앞으로 닥쳐올 시간에 무엇부터 포기할 것인지 순위를 정했다. 면허는 반납하지 않았다지만 이미 엄마는 운전을 중단했고 아버지는 야간 운전을 하지 않는 상태다. 현재 아버지가 운전해서 외출하는 일은 탁구장에 새벽 운동을 가고 근교의 텃밭에 들르는 정도다. 자차가 없으면 농기구와 수확 거리를 옮기기 어려우니 농사를 첫째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커뮤니티에 탁구장이 있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려면 그간 잘 지내온 좋은 이웃도 포기해야 한다. 아직은 괜찮다고 손사래 치는 늙은 부모를 윽박지르며, 불효녀는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 서러운 포기의 목록을 작성한다.
고령자들이 안전 운전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잔존 능력을 최대화하도록, EU가 도입한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장착과 일본에서 부착을 의무화한다는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 등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 지역의 노인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지자체 18곳에서 운영한다는 콜버스 ‘셔클’이 광범하게 시도되길 바란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추억이었다면, 가장 나종까지 지켜야만 할 것은 이토록 사소하고도 소중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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