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조, 구토 투혼...김원호·정나은, 드라마 같은 은메달
배드민턴 혼합복식 김원호(25·삼성생명)-정나은(23·화순군청)이 2024 파리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다. 김원호·정나은은 2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포르트 드 라 샤펠 아레나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중국 정쓰웨이-황야총 조에 0대2(8-21 11-21)로 패배했다.
세계 랭킹 8위 김원호·정나은은 이번 대회를 불안하게 시작했다. 조별리그에서 1승 2패로 탈락 위기에 몰렸으나, 게임 득실 차로 겨우 8강에 올랐다. 그러나 토너먼트 단계에선 달랐다. 8강전에서 세계 7위 탕춘만-체잉수엣 조를 꺾은 데 이어, 준결승에서 대표팀 선배인 세계 2위 서승재-채유정까지 이겼다. 경기 중 구토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은 김원호의 투혼과
지친 그를 대신해 상대 강공을 막아낸 정나은의 집중력이 돋보였다.
결승에서 만난 중국 조는 세계 랭킹 1위.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했다. 조별리그에 이어 결승에서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값진 은메달이다. 한국 배드민턴은 지난 세 차례 올림픽에서 모두 동메달 1개씩을 따는 데 그쳤다. 김원호·정나은이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처음 결승에 올랐다. 혼합복식 종목만 따지면 16년 만의 메달이다. 2008 대회 이용대-이효정 금메달 이후 메달이 없었다.
김원호는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혼합복식 금메달리스트 길영아(54) 감독의 아들이다. 부자(父子) 메달리스트 여홍철(1996 애틀란타 은)-여서정(2020 도쿄 동)이 있지만, 모자(母子) 메달리스트는 한국 최초다. 김원호는 전날 준결승에서 승리하며 메달 획득을 확정한 순간 “이제 ‘길영아의 아들’로 사는 대신 엄마가 ‘김원호의 엄마’로 살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 엄마 길영아의 말이다. 엄마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한 김원호에겐 ‘길영아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늘 쫓아다녔다. 시합을 잘하든 못하든 “쟤가 길영아 아들이래”라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김원호가 길영아에게 “엄마가 평범한 사람이면 좋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엄마 길영아가 한 말이 “배드민턴계에서 엄마는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다. 네가 스스로 ‘길영아 아들’로 살지 말고, 엄마를 ‘김원호 엄마’로 살게 해달라”였다. 아들은 올림픽 메달을 딴 인생 최고의 순간 가슴 깊이 새겨뒀던 엄마의 말을 꺼냈다.
김원호는 어릴 적부터 엄마를 따라 배드민턴장에 다니며 자연스레 라켓을 잡았다. 그의 아버지도 배구 선수 출신. 운동 신경이 남달랐다고 한다. 엄마 길영아는 “축구도 잘하고, 달리기도 빨랐다”며 “라켓을 잡으면 끝을 모르고 쳤다. 멈추지 않고 계속 쳐달라고 하더라”라고 했다. 자신들이 걸어온 힘든 운동선수의 길을 따라오지 않기를 바랐던 부모도 아들 재능을 보고 반대할 수가 없었다.
김원호는 고3 때는 전국 동급생 중에 최고 실력자로 평가받아 졸업하면서 배드민턴 명문 삼성전기(현 삼성생명)에 입단했다. 그때도 감독이 엄마 길영아였다. 서로의 존재는 부담이었다. 특혜를 준다는 질투가 나올까 봐 엄마는 아들 지도를 다른 코치들에게 맡겼고, 아들은 ‘엄마 찬스’란 말이 듣기 싫어서 매 훈련, 매 경기 사력을 다했다. 평소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성격이라 혼자 끙끙 앓을까 걱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상훈씨는 “주니어 대표팀, 성인 대표팀에 실력으로 뽑혔는데도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있어서 원호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며 “묵묵히 잘 이겨내줘서 지금의 행운이 온 것 같다”고 했다.
길영아는 직접 파리에 날아와 관중석에서 아들 경기를 모두 지켜봤다. 특히 한국 선수끼리 붙은 준결승에서 구토까지 하며 뛰는 모습을 마음 졸이며 지켜봤다. 길영아는 “아들 얼굴을 보니까 곧 토를 할 것 같아 보였다. 토하고 다시 하라고 소리도 질렀는데 안 들린 것 같더라”라며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까지 왔는지 내가 너무 잘 알아서 가슴이 쓰라렸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 중국 선수가 코트에 쓰러져서 숨진 일이 있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됐다”며 “더 못 뛸 줄 알았는데 끝까지 있는 힘껏 스매시를 때리는 걸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길영아는 올림픽을 앞두고 아들에게 “세계 10위 안에 있으면 실력은 다 종이 한 장 차이다. 올림픽은 하늘이 주는 기회니까 최선을 다하고 나서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을 해줬다”며 “그래도 아들이 엄마 따라 올림픽 메달까지 따서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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