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가 아니라 성 노예”... 클린턴 장관 발언에 일본 반발
미일관계 안 좋은 상황에서 “모든 문서에 ‘위안부’ 금지” 명령
본지 보도를 미국 매체가 확인 후 일본에도 확산
국회도 “성 노예로 바꿔라” 정대협은 ‘위안부’ 고수 결정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 고위급 취재원이 지나가는 말로 힐러리 발언 언급
외교안보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다 보면 한반도를 넘어서 외국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미 관계는 호전됐는데, 일본에서 민주당이 집권후 미일관계가 좋지 않았던 2012년에도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2012년 7월 초, 미국을 잘 아는 고위급 취재원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국제정세에 대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을 때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클린턴이 여권 향상에 힘쓰는 페미니스트인데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말했습니다. “국무부 부하 직원이 힐러리에게 한일관계에 대해 보고 하는데 일본군 위안부라고 쓰지 말고 성 노예로 쓰라고 지시했다고 하더군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우리가 느끼기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한일 간의 역사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국무장관이 위안부를 성 노예로 써야 한다고 지시했다니….
대화를 마치고 다른 취재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취재에 착수했습니다. 어렵지 않게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를 당시 정치부장에게 보고했더니 1면에 쓰자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2012년 7월 9일 자에 이런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표현 대신 ‘강제적인 일본군 성 노예(enforced sex slaves)’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8일 확인됐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클린턴 장관은 최근 미 국무부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한일(韓日) 과거사와 관련된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 고위 관계자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쓰자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며 “(일본에 의해 동원된)그들은 ‘강제적인 일본군 성 노예’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이후 일본군 위안부 대신 성 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보고를 마쳤다고 한다. 미국은 지금껏 한일 과거사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켜 왔다. 비록 비공개 석상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클린턴 장관의 이번 언급은 일본군 성 노예 문제를 다루는 일본 정부의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1면에 2단 크기로 나간 이 기사가 큰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쓴 이 기사는 다음 날 미국의 ‘넬슨 리포트’가 받아서 후속 보도를 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넬슨 리포트는 발행인 크리스토퍼 넬슨이 1986년 창간한 유료 정보지로 주로 워싱턴 정계의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넬슨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관심이 많아서 조선일보 영문판을 매일 같이 읽어오다가 제가 쓴 클린턴의 성 노예 발언 기사를 발견하고, 미 국무부를 취재했습니다.
그 결과 클린턴이 미국의 모든 문서와 성명에 일본어 ‘위안부(comfort women)’를 그대로 번역한 말을 쓰지 말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음을 확인해 보도함으로써 조선일보 보도가 정확했음을 입증했습니다. 넬슨 리포트는 “클린턴 장관의 이 발언은 일본에 충격을 주고 있으며 미국이 한국은 물론 (성 노예 피해를 입은) 중국·인도네시아·필리핀·호주·뉴질랜드·네덜란드의 편을 들어서 공식적으로 일본과 맞선다는 것으로 읽히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미 국무부 패트릭 벤트렐 부대변인도 9일 정례 브리핑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여성들(일본군 성 노예)에게 일어난 일은 비참했다”며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심각한 인권 위반’이라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클린턴의 이 표현은 당시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서 일본군 성 노예 문제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미 연방하원은 2007년 일본군 성 노예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이 결의안은 ‘성 노예(sex slavery)’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일본의 책임을 명시했습니다. 당시 톰 란토스 연방하원 외교위원장은 “일본 정부가 아시아와 태평양의 젊은 여성들을 성 노예로 강제동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겐바 일본 외무상 반발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클린턴 장관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내에 세운 ‘성 노예 추모비’에 대해 일본 정부와 정치권이 철거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했습니다. “클린턴 장관이 최근 공식 문서에 위안부가 아닌 ‘성 노예’로 표기할 것을 지시한 데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이 같은 보도가 잇달아 나오자 일본 외무성이 나서기 시작합니다.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일본 외무상은 10일 국회에서 “클린턴 국무장관이 일본군 위안부를 ‘성 노예’라고 표현했다는 보도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만약 미 국무장관이 성적 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지금까지의 총리의 사죄 표명, 위안부 지원을 위한 아시아여성기금 창설 등의 조치를 설명하고, 이는 틀린 표현이라고 말하겠다”고 반발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클린턴의 발언이 부적절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과거 여러 차례 사과와 보상을 통해 해결된 사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위안부’라는 용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이를 변경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일본은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에 이어 미국 공문서에 ‘성 노예’ 표현이 등장할 경우, 이 표현이 공식 표기로 자리 잡게 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미국은 물론 다른 모든 나라에 성 노예 표현이 확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성 노예’로 표현 요구
이 문제는 국내에서도 관심을 모았습니다. 본지 보도 이후 열린 7월 13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 전체회의에서 민주통합당 심재권 의원이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관련 질문을 하면서 확산했습니다. 이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 전체회의에서 심 의원과 김 장관 간에는 이런 논의가 오갔습니다.
◯심재권 위원 그다음에 아까 우리 존경하는 인재근 위원께서도 기림비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단적으로 장관님 우리도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에 ‘성노예’다라는 말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외교통상부장관 김성환 저는 검토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당사자 분들과 협의해서, 지금 쓰고 있는 위안부라는 표현 자체가 과거에 그분들의 의견을 다 반영해서 만든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같이 협의해서 용어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재권 위원 저는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또 국제적으로 일반적으로 이것은 ‘강제된 성노예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동양적 의식에서 점잖게 표현을 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일본의 비위를 맞추려고 이렇게 표현했는지 모르지만 위안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교통상부장관 김성환 예.
◯심재권 위원 따라서 저는 이제 우리가 보다 직설적으로 ‘성노예’라는 표현으로 써야 된다고 보면서 우리 장관께서 이 문제를 정부 내에서 제기해 주시고 그렇게 바꾸는 노력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외교통상부장관 김성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심 의원이 “위안부 대신 성 노예라는 표현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김 장관이 “지금이라도 용어는 살아계신 분들과 협의해서 바꿀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2018년 정의기억연대로 이름 변경)는 “우리의 마음을 읽어준 것 같아 매우 고맙고 힘이 된다”고 밝혔습니다. “클린턴 장관은 평소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의지를 보여 온 사람으로서 이번 발언은 매우 의미 있고 진실하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전 국회의원)는 힐러리의 ‘강요된 성 노예(enforced sex slave)’에 대해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의 보고서 등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성 노예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당시 피해 당사자들이 위안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굳이 국문 표현을 ‘성 노예’로 변경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려 현재 국문으로는 위안부라는 용어가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악화된 미일관계가 ‘성 노예’ 발언에 영향 미쳤나
그렇다면 클린턴은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요? 무엇보다 여성 권익 신장을 주장해 온 클린턴이 ‘위안부’라는 용어가 그들이 겪은 실제적 고통과 성 착취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제 사회, 특히 유엔에서도 지지받는 표현입니다. 클린턴은 ‘성 노예’라는 용어는 이들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명확히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2009년부터 일본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반미 성향이 강해져 미일 관계에 긴장을 초래한 것이 배경이었습니다. 민주당은 자민당과는 달리 미국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려고 했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외부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선거 공약 중 하나였지만, 미국과의 기존 협정을 무시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일본 민주당 정부는 미국 대신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일본의 외교 정책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미국 안팎에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2012년 12월 자민당이 총선에서 승리, 재집권하면서 아베 신조 총리 2기 체제가 시작됐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한 아베 총리 체제에서 미일관계는 단순히 회복되는 차원을 넘어서 인도 태평양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한 단계 더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하지만, 클린턴 장관의 지시 이후, 미국의 공문서에 “comfort women”과 “sexual slavery”가 번갈아 사용되거나 병기되는 경향이 자리잡았으며 미일관계가 최고조에 이른 지금에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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