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 공포’에 인텔 실적 쇼크… 美 금리 인하 호재까지 묻었다
미국발(發) 경기 침체 공포가 확산하면서 2일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주요 증시가 일제히 큰 폭으로 하락했다. 한국 코스피가 3.65% 급락해 2700선이 깨진 것을 비롯, 일본 닛케이평균이 5.81%, 대만 가권지수가 4.43% 떨어졌다. 코스피 하락률은 2020년 8월 이후 4년 만의 최대였고, 일본과 대만 하락률도 각각 4년 5개월, 4년 7개월 만의 최고 기록이었다.
하락률이 아닌 하락폭으로 계산하면 일본과 대만 증시의 폭락이 두드러졌다. 닛케이평균은 하루 만에 3만8126엔에서 3만5909엔으로 2217엔 떨어졌는데, 이는 지난 1987년 10월 19일 블랙먼데이(3836엔) 이후 최대 하락폭이다. 블랙먼데이는 뉴욕 증시가 개장하자마자 대량의 매도 주문이 쏟아져 다우평균이 22.6% 폭락한 사건을 말한다. 이날 가권지수 하락폭은 1004포인트(2만2642→2만1638)로 대만 증시 역사상 최대였다.
이날 아시아 증시의 ‘블랙 프라이데이’를 촉발한 것은 미국 제조업·고용 지표의 동반 부진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발 경기 침체 우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오는 9월 기준금리를 낮출 것이라는 호재까지 묻을 정도로 강력했다. 여기에 엔비디아 등 생성형 인공지능 관련 기업의 거품 우려, 인텔의 올해 2분기 실적 쇼크와 대규모 구조조정도 경기 침체 공포를 부채질했다.
글로벌 경기 흐름에 민감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아시아 증시에서 대규모 주식 매도에 나서면서 주가 하락을 이끌었다. 외국인은 이날 유가증권 시장에서만 8400억원 넘게 주식을 순매도(매도 금액에서 매수 금액을 뺀 것)했다. 기관도 7700억원 넘게 순매도하며 ‘쌍끌이 매도’에 나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아시아 증시 폭락에 대해 “주식시장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2021년부터 지속된 고금리 기간에는 경제지표가 좋지 않게 나올 경우 금리 인하 기대감 때문에 주가가 올랐지만, 미국의 9월 금리 인하가 기정사실화된 현재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경제지표가 경기 침체 우려를 증폭시켜 주식시장에 악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난 1일 발표된 미국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와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시장 예상보다 경기 위축이 심각해졌다는 우려를 낳았다. 미 노동부가 발표한 지난주(7월 21∼27일)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24만9000건으로 지난해 8월 첫째 주간(25만 8000건) 이후 약 1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는 다우존스가 집계한 전문가 전망치(23만5000건)도 웃도는 수치였다.
미 공급관리협회(ISM)가 집계한 7월 PMI 역시 46.8로 시장 예상치(48.8)를 밑돌았다. 이 지수는 50보다 높으면 경기 확장을, 50보다 낮으면 경기 위축을 의미한다. 이번 PMI는 지난해 11월 이후 8개월 만의 최저치였다.
2일 발표된 미국의 7월 실업률도 4.3%로 6월(4.1%)보다 높아졌고, 전문가 예상치(4.1%)를 웃돌았다. 비농업 부문 일자리는 전월 대비 11만4000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직전 12개월간 평균 증가폭(21만5000명)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다우존스가 집계한 전문가 전망치(18만5000명)도 크게 밑돌았다. 고용 부진이 계속되면서 미국 경기침체 우려는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텔의 실적 부진과 감원 발표
여기에 인공지능·반도체 등 증시 훈풍을 이끌던 기업들이 기대 이하의 실적을 내놓은 점도 증시 급락의 배경으로 꼽힌다. 인공지능 대표주인 엔비디아는 1일 6% 넘게 급락했고, 인텔(-5.5%) 등 주요 반도체주도 일제히 큰 폭으로 하락했다.
반도체 기업 인텔은 부진한 2분기(4~6월) 실적을 내놓으며 ‘실적 쇼크’를 보였다. 인텔은 올해 2분기 매출이 1년 전 동기 대비 1% 줄었으며, 순손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 14억8000만달러 순이익에서 16억1000만달러 순손실로 전환됐다고 밝혔다.
특히 인텔은 장 마감 직후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도 발표했다. 100억달러 비용 절감을 위해 전체 직원의 15%가량을 감원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1992년부터 배당금을 지급해왔던 인텔은 2024 회계연도 4분기에는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하고 연간 자본 지출도 20% 이상 줄이기로 했다. 인텔 주가는 실적 발표 이후 시간 외 거래에서 20% 가까이 폭락하기도 했다.
◇‘금리 인하’ 기대감 꺾은 침체 공포
미 연준이 지난달 31일 9월 금리 인하를 시사하면서 고금리 시대가 끝날 것이란 기대감에 시장은 환호했지만, 그 효과는 ‘하루 천하’로 끝났다. 뉴욕 월가에서는 “연준이 7월에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은 것이 ‘실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해리스금융그룹의 제이미 콕스는 “PMI가 일회성인지 혹은 전례 없는 침체를 향해 가는 과정인지를 두고 시장이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시장에서는 연준이 이미 금리를 내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시아 증시에서 금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곳은 일본이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지난달 31일 기준금리를 연 0~0.1%에서 연 0.25%로 인상한 것이 주식시장에서 악재로 작용한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금리 인하를 단행하거나 검토하는 상황에서 일본 금리가 오르면 일본 엔화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일본 수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낮아져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에 불리해진다. 이날 일본 증시 시가총액 1위인 도요타자동차는 4.2% 하락한 2585엔에 마감했고, 소니, 키엔스, 히타치 등도 일제히 6~10% 하락했다. 반도체 장비 기업인 도쿄일렉트론은 12% 가까이 급락했다.
증시 급락세가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엇갈린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증시 급락의 원인은 경기 둔화 우려와 엔비디아 급락,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과 중동 전쟁 가능성 재부각 등 복합적이다”라며 “금리 인하를 앞둔 상황에서 과거 ‘금리 인하가 곧 경기 침체’였다는 공식이 부정적 우려를 확대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경기 침체 이슈는 지속적으로 불거져 왔던 사안”이라며 “시장이 무너지고 있다기보다는 단기적으로 상승과 하락의 변동성이 커진 상황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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