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러 냉전 이후 최대 규모 수감자 교환…배경엔 '죽은 나발니'
서방과 러시아가 냉전 이후 최대 규모로 수감자 맞교환을 단행했다. 미국인 3명 포함 러시아에서 16명, 서방에서 8명이 석방돼 총 24명이 풀려났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번 협상 타결이 동맹국과의 "외교와 우정"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석방을 강하게 요구한 전 정보 요원의 경우 지난 2월 사망한 러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석방 가능성을 보고 독일 쪽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풀어주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1일(이하 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 시민 3명 및 영주권자 1명, 독일인 5명, 러시아 정치범 7명 등 러시아에 갇힌 16명의 수감자를 석방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협상 타결이 "외교와 우정의 위업"이었다며 이를 도운 독일, 폴란드, 슬로베니아, 노르웨이, 튀르키예(터키)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이는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이 왜 필수적인지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동맹은 미국인을 더 안전하게 만든다"며 "누군가 동맹이 중요한지 의문을 제기한다면 동맹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동맹을 경시하고 고립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교환으로 지난해 3월 간첩 혐의로 구금돼 4달 만에 16년형을 선고 받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32), 간첩 혐의로 2018년 12월부터 구금된 미 해병대 출신 폴 윌런(54), 거짓 정보 유포 혐의 등으로 지난해 10월부터 구금된 자유유럽방송(RFE) 편집자 알수 쿠르마셰바(47) 등 3명의 미국인이 석방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들이 러시아에서 "부당하게 투옥"됐고 "조작된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 받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야권 운동가 일리야 야신(41), 블라디미르 카라 무르자(42) 및 나발니의 동료들 등 러시아 정치범들도 석방됐다.
이를 위해 서방은 러시아 쪽이 핵심적으로 요구한 러 정보 요원 출신 바딤 크라시코프(58)를 비롯해 지난달 슬로베니아에서 러시아 간첩 혐의를 인정한 아르템 둘체프와 안나 둘체바, 신용카드 정보 관련 해킹 혐의로 2017년 미국에서 징역 27년을 선고 받은 로만 셀레즈네프(40), 지난해 기업 정보를 해킹해 증권 거래에 악용한 혐의로 9년형이 선고된 블라디슬라프 클류신(43) 등 러시아인 8명을 석방했다.
미 백악관은 나발니도 이번 협상 대상에 포함돼 있었다고 밝혔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일 언론 브리핑에서 "우리는 파트너들과 함께 알렉세이 나발니가 포함된 협상을 진행 중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사망했다"고 말했다.
사망 전 나발니 석방 가능성은 이번 협상이 타결에 이를 수 있었던 주요 동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일 <뉴욕타임스>(NYT)는 독일에 수감된 크라시코프 석방을 꺼리던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의 압박과 더불어 나발니 석방 가능성을 보고 결국 크라시코프 석방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미 정부 고위 당국자는 1일 협상 타결 배경 브리핑에서 올 초 바이든 대통령과 통화하고 만난 숄츠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에 "당신을 위해 이 일(크라시코프 석방)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9년 독일 총리실 인근 베를린의 한 공원에서 대낮에 전 체첸 반군 사령관 젤림칸 칸고슈빌리를 죽인 뒤 독일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크라시코프 석방은 숄츠 총리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나발니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협상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워싱턴포스트>(WP)는 설리번 보좌관이 독일이 나발니 없이도 협상에 동의할 수 있도록 나발니의 동료를 포함한 러시아 민주주의 활동가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고 정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전했다.
1일 바이든 대통령은 "그들(러시아)이 내게 요구한 것은 독일에 상당한 양보를 얻어내야 하는 사안이었고 원래는 독일이 문제의 인물(크라시코프) 탓에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사안"이었다며 협상 타결에 관해 "특히 (숄츠) 총리에 큰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이 1일 수감자 석방 뒤 나발니의 배우자 율리아 나발나야와 통화해 "러시아의 정의와 법치를 위한 남편의 노력을 이어가는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나발나야는 나발니 사망 뒤 러시아 야권 운동의 새 중심으로 부상했다.
미 공화당은 언론인 등 러시아에 부당하게 억류된 이들과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독일 등에 억류된 크라시코프 등을 맞교환한 것을 비판했다. 공화당 소속 마이클 맥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성명을 내 "무고한 미국인들과 미국 및 다른 곳에 수감된 실제 러시아 범죄자 교환을 계속하는 것은 푸틴(러시아 대통령)에게 더 많은 인질 납치를 장려하는 위험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관련해 1일 브리핑에서 "국무부 인질 협상가인 로저 카스텐스는 이러한 교환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납치된다는 증거가 실제로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정부가 협상으로 인한 국내 정치적 비용이 의미 있는 수준이 아니고 협상을 거부한다고 해서 인질 납치가 반드시 중단되는 것도 아니라고 일찌감치 결론을 내렸다고 분석했다. 매체는 정부가 "무의미한 원칙을 고수해 무고한 시민을 외국 감옥이나 테러리스트 시설에 방치하는 것보다 집으로 내려오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봤다.
독일 도이체벨레(DW) 방송은 석방돼 독일에 도착한 일부 수감자들과 만난 숄츠 총리가 비판에 대해 "옳은 결정이었고 의심은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숄츠 총리는 이 경우 형을 집행하려는 국가의 이익과 러시아에 수감된 무고한 사람들의 자유가 비교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협상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큰 승리"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크라시코프 석방이 푸틴 대통령의 "조국에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도 낙오시키지 않겠다는 러시아 보안 서비스에 대한 약속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러 <타스> 통신을 보면 2일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 직접 나가 석방된 러시아 수감자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충성심에 감사를 표했다. 러 <스푸트니크> 통신은 1일 러시아 기관 소식통을 인용해 "러시아가 이번 협상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협상이 우크라이나 전쟁 협상의 문을 여는 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1일 설리번 보좌관은 언론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인질 및 구금자 협상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잠재적 외교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둘은 별개의 궤도"라며 선을 그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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