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일그러진 수령” 김일성의 혁명가 콤플렉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4. 8. 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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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1회>

1990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 대회. 북한과의 연계하에 열린 이 대회는 90년대 주사파 운동의 대표적 이벤트였다. 공공부문

김일성 신화에 빠졌던 남한 청년들

경상북도 달성군 출신 소설가 석윤기(1929-1989)는 북한에서 “국보적인 작가”라 불린다. 북한에선 김정일의 지시 아래 1972년부터 2015년까지 40편의 가장 우수한 “수령 형상 문학”을 추려서 “불멸의 력사 총서”가 간행됐는데, 그중 ‘고난의 행군’, ‘두만강 지구’, ‘대지는 푸르다’, ‘봄우뢰’ 등 4편이 석윤기의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수령 형상 문학”이란 “김일성 주석의 혁명업적과 공산주의적 풍모를 반영하는” 작품을 이른다.

석윤기의 작품 중에서 특히 장편소설 ‘봄우레’(1984년 작)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남한 대학가 민족해방파(NL) 운동권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지난 회 언급했듯 지방 출신의 한 친구는 주사파로 활약하던 세 살 위 친형의 지도를 따라 고교 시절 그 작품을 읽고서 “”위대한 수령 장군님을 따라서 미제 괴뢰도당을 물리치고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혁명 투쟁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왔다”고 내게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북한의 정치전이 고교생들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1989년 도서출판 힘에서 출판한 북한 작가 석윤기(1929-1989)의 장편소설 '봄우뢰'(1985년). 석윤기의 묘비에는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의 위원장이라 적혀 있다. 공공부문

궁금증이 일어서 그 친구에게 굵직한 ‘봄우뢰’ 상·하권을 빌려서 읽었다.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쑥쑥 읽히는 정교한 문체가 예사롭지 않았고, 박진감 넘치는 구성도 훌륭해 보였다. 다만 단 두 쪽을 읽기도 전에 조선노동당의 체제 선전물이라는 점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1930년대 두만강 넘어 간도(間島)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추수 투쟁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에는 용떡, 영희, 재률, 상갑 등 숱한 인물들이 어지럽게 등장하는데, 유독 한 사람에게만 “···께서,” “···하시였다,” “드렸다” 등등의 극존칭이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그 한 명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다음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 “김일성동지께서 일행과 함께 다가오시자 허재률은 총을 그이께 내드리며 사연을 말씀드렸다.”

2)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웃음을 띠시고 해빛에 번쩍거리는 총을 이리저리 제껴보이시며 말씀하시였다.”

3) “감상갑은 어쩐지 문제가 자기 같은 농민이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지만 질문 자체가 벌써 대답을 암시하고 있는 데다 김일성동지께서 서글서글 웃으시며 너무 실감있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끌려들어 선뜻 대답을 올렸다.”

4) “그야 저 녀석 대답이 아닙지요. 김일성동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 김일성동지야 우리 조선민족의 령도자가 아니신가요? 그이의 말씀이야 여부가 있겠소?”

소설의 첫 배경은 1931년 9.18 만주사변 직후로 설정되어 있었다. 1912년생 김일성은 그 당시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벌써 그때 김일성이 간도 농민들 사이에서 “우리 조선 민족의 령도자”라 불렸단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 소설 전체가 형편없는 조선노동당의 선전물처럼 느껴졌다. 결국 다 읽지 않은채로 그 책을 돌려주면서 친구에게 물었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라 그냥 지어낸 픽션이잖아? 김일성의 나이가 그때 고작 스무 살도 안 됐는데 간도 어떻게 만주 전역 조선인들을 다 모아서 혁명 운동을 할 수가 있겠어. 아무리 봐도 이건 북한의 선전물인 거 같다.”

숫기없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 친구는 잠시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책이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철저히 근거한 역사 다큐멘터리이고, 여기 나오는 모든 사건은 수백 명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이 된다고 하더라고.”

그는 친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북한의 역사서들을 읽었는데, 그런 책들에 제시된 여러 사건이 <<봄우레>>의 내용과 부합한다고 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쯤에서 어색하게 끝이 났다.

대체 왜 김일성이 “민족의 태양”이 되었나?

1945년 9월 서른세 살의 김일성은 소련군 수송선 “뿌가쵸프”를 타고 비밀리에 입북했다. 1940년 10월 이래 그는 줄곧 소련 시베리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입북 직전 스탈린의 부름을 받고 모스크바로 가서 앞으로 38선 이북 지역을 다스릴 조선인 최고 영도자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다.

북한의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그 후 1994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일성은 49년의 긴 세월 동안 북한에서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날마다 모든 북한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降臨)하는 명실상부 인격신(人格神)의 삶을 살다 갔다. 대체 김일성은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스스로 “어버이 수령”이자 “민족의 태양”이 되어야만 했을까?

구미(歐美)의 소위 북한 전문가 중에는 김일성이 “불멸의 영도자”가 된 이유를 김일성의 업적과 능력에서 찾는 부류가 있다. 시카고대학 명예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나 그의 제자인 전(前) 컬럼비아 대학 교수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 1962- , 2020년 논문 표절로 파면)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북한의 북한을 극단적 스탈린주의의 “악당 정권(rogue state)”이라 비판하는 구미(歐美) 학자들과 언론인들을 질타하면서 김일성이 체현한 혁명적 민족주의(revolutionary nationalism)와 한민족사에 뿌리 깊은 신유학적(Neo-Confucian) 전통을 보라고 외쳐왔다. 암스트롱은 항일 무장투쟁에 덧붙여 6.25남침 이전에 김일성이 이룩한 “북한혁명(1945-1950)”의 혁혁한 위업이 지금까지도 북한 정권의 탄력성(resilience)을 설명하는 열쇠라고 설명(?)한다. 한편 커밍스는 미국의 협박과 압력 때문에 북한이 어쩔 수 없이 핵무장을 했다는 주장도 서슴없이 펼친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이 쌓은 항일 무장투쟁의 경력이야말로 김일성이 북한에서 지금까지 절대 권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일본의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나 한국 성공회대학의 한홍구,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종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전개한 항일 무장투쟁이 김일성을 만들었다는 판에 박힌 설명이다. 이들의 연구서를 읽다 보면, 김일성의 위대함을 인정하라 강요하는 듯하다.

혁명가 콤플렉스에 찌든 김일성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중국인의 명령에 따라 소규모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점은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명령과 지시에 따랐던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이후 그가 누린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기엔 터무니없이 소소한 경력이라는 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20대부터 중국공산당의 창당 주역으로서 혁명 운동에 투신하여 중국 땅에서 실제로 소비에트 혁명사업을 추진했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의 거의 모든 땅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던 인물이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1890-1965)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하고 1941년부터 베트남 독립동맹을 조직하여 프랑스 및 일본의 침략자들에 맞서 전쟁을 벌였던 영웅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미화한 북한의 선전물. 공공부문

북한의 수령이 되기 전에 김일성은 대체 무엇을 했던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하위 조직에 들어가서 20대를 보내다가 관동군에 쫓겨 시베리아로 도주한 후 5년간 소련군의 일원으로 복무했을 뿐이었다. 마오쩌둥이나 호치민의 군사적 활약에 비한다면, 김일성의 무장투쟁은 경찰서 기습이나 민가 약탈 등의 소규모의 “비적질”에 불과했다. 공산주의 혁명가로선 세계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소소한 이력이다. 소련군이 이북을 점령하지 않고서 한반도 전역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더라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아 연금 타서 살았으면 좋았을 수준이다. 그 점은 누구보다도 김일성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이후 김일성의 비서실장까지 역임했던 홍순관(洪淳寬)은 김일성의 항일 활동을 대해일적(大海一滴, 큰 바다의 물 한 방울)이라 했다.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의 유령작가라는 황장엽은 1970년대 초까지 김일성은 입버릇처럼 “만주에서 총질을 좀 했지만 크게 한 일은 없다”고 되뇌곤 했다고 증언했다(이명영, ‘세기와 더불어는 어떻게 날조되었나’ 세이지, 2021, 15쪽). 또 황장엽은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30년대 항일 빨치산 군복을 입은 김일성 부부.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을 미화하는 북한의 선전물. 공공부문

“아무리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을 과장한다 하여도 모택동의 영도 밑에 2만 5천 리 장정을 하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해방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투쟁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그 규모나 연한으로 보아 큰 것이 되지 못하며 더구나 북한을 ‘해방’하는 데는 직접 기여한 것이 없다. 북한을 ‘해방’한 것은 전적으로 소련의 붉은 군대였고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들은 여기에 전혀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고 하여 젊은 시기에 항일 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김일성의 공로를 누구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자기의 경력까지 솔직하게 내놓지 않고 자기의 투쟁 역사를 크게 과장하여, 마치도 젊은 시절부터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로 추대된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위의 책, 제1부 4장)

베트남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사심 없이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호치민을 “엉클 호”라 부르며 존경한다. 중국인들도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여 참혹한 내전을 종식하고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을 개세영웅(蓋世英雄)으로 떠받든다. 북한 인민은 왜 김일성을 신처럼 떠들어야만 하는가? 조선노동당 선전부가 거짓 선전과 세뇌 교육으로 인격 숭배를 강요하고, 조금이라도 반항기를 보이면 처형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격화된 김일성은 실존 인물 김일성과는 동떨어진 조작과 허구의 ‘데미갓(demigod)일 뿐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 발탁되기에 김일성의 투쟁 이력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는 마오쩌둥이나 호치민을 보면서 몸서리쳐지는 혁명가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듯하다. 혁명가 콤플렉스를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김일성은 공권력을 총동원해서 1930년대 자신의 항일 무장투쟁을 과장하고, 날조했다. 이명영 교수의 표현대로 북한은 “1%의 사실로 날조한 99% 허구”로 김일성 항일투쟁 신화를 만들었다.

김일성은 분명 죽는 날까지 혁명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992년에서 1996년에 걸쳐 출판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8권이 그 점을 보여준다. 수천 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회고록은 놀랍게도 1912년부터 1945년까지 33년의 이력에 100% 국한되어 있다. 한편 김일성의 회고록은 1950년대부터 계속 여러 차례에 걸쳐서 출판되었는데, 1990년대 완정본(完整本)이 나온 후 북한 정부는 조작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이전의 판본들을 수거해서 소각했다 한다.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 회고록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여 김일성 신화가 어떻게 가필·첨삭을 거쳐 조작되었는지를 밝혔다.

통상적으로 정치지도자의 회고록은 성장기나 청년기보다는 집권하여 국정을 펼친 시기에 집중되게 마련이다. 이와 달리 김일성의 회고록은 1945년 이전에 국한되어 있을뿐더러 특히 1935년에서 1937년까지 불과 2, 3년의 “항일 무장투쟁”에 거의 절반을 할애했다. 회고록의 절정은 바로 제6권 제17장 “조선은 살아있다(1937년 5월 ~ 1937년 6월)”의 ‘보천보의 불길’(1), (2)라 할 수 있다. “보천보 전투”의 실상에 대해선 다음 회에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석윤기의 “봄우뢰”를 읽고서 “장군님의 영도를 따라서 반미 구국 투쟁”에 나섰다는 그 시절 운동권의 열혈 주사파 제군(諸君)에게 묻고 싶다.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이 되어 스스로 ‘만주에서 총을 좀 쏘긴 했다’는 김일성(1912-1994)의 당시 계급이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그가 장군이었나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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