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 20] “선언 백 번 하면 뭐 하냐, 실천을 해야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스무 번째 글은 장윤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 연재 1~18 바로가기
나는 동아일보 창간 41주년 기념일인 1961년 4월 1일 동아일보 공채 3기로 입사했다. 외신부에서 수습기자 6개월 만인 9월에 공군에 입대했지만 서울 근교의 공군 본부에 근무한 덕분에 입사 동기생들은 물론 신문사 선배들과도 가끔씩 어울렸다. 군 복무를 마치고 4년 만에 신문사에 복직했을 때는 동아방송국이 개설되고 여성동아가 창간되어 동아 식구들이 대폭 늘어 있었다.
나는 다시 외신부로 복귀해 2년 남짓 지내다가 1967년 초부터 문화부로 자리를 옮겨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공연예술 분야 전문기자로 줄곧 이어왔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기관원들이 신문사에 무상출입하면서 제작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앞두고 우리나라 대표 언론인 동아일보를 꺾는데 주력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신동아 필화 사건’으로 홍승면 주간과 손세일 부장이 구속되고 천관우 주필을 비롯한 3명의 간부가 해직됨으로써 동아는 독재 정권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무렵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뿐만 아니라 변질되어가는 동아일보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데모가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했다. 1971년 3월 26일 후배인 서울대생 50여 명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서 “민중에게 지은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언론 화형식을 벌였다. 뒤늦게 달려온 경찰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끌려가는 학생들을 편집국에서 내려다보면서 참담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책감을 벗고 실천의 길로
1972년의 10월 유신과 반헌법적인 긴급조치로 숨이 막힌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은 몇 차례 언론자유선언과 언론노조 설립 등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4년 가을 기자협회 집행부와 동아일보분회의 개편 기회가 왔다. 언론운동을 주도한 후배들이 기협회장에는 같은 문화부의 김병익 기자, 동아일보 분회장에는 나를 추대한다는 말을 듣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견뎌온 무거운 자책감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선언만 백번 하면 뭐 하냐? 실천을 해야지!”라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나의 강성 발언에 후배들도 놀라는 모습이었다. 또한 그동안 진부하게 써오던 ‘언론자유’ 대신 보다 역동적인 ‘자유언론(free press)’으로 용어를 바꾸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10월 24일이 '유엔데이'로 공휴일이라 외근 기자들이 함께 동참할 수 있어 거사일로 잡은 것이다.
1975년 새해 접어들면서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따른 민주 시민들의 격려 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고 한동안 언론이 정상적인 길을 걷게 되자 여당인 공화당 박준규 정책위 의장은 '동아일보는 기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동아일보가 광고를 되돌려 받고 싶으면 자유언론 실천에 앞장서는 기자들을 쫓아내라'라고 노골적으로 회사 경연진과 사원들을 이간시키기 시작했다.
자유언론 정신을 구체적으로 지면이나 방송에 실천하는 과정에서 데스크와 마찰이 빈번히 일어나므로 차장급을 자유언론 실천 대열에 적극 참여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것을 느끼고 분회장을 차장급으로 격상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내가 수습 3기로 입사하기는 했지만 군 복무 4년의 공백 때문에 동기생들과는 달리 평기자였다. 동아분회 집행부는 그동안 노조 운동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온 문화부 권영자 차장을 분회장으로 추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권 차장은 당시 상황에서 분회장직이 엄청난 가시밭길임을 잘 알면서도 후배들의 간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선출을 위한 총회가 열리기로 했던 3월 8일 오후 회사 측은 갑자기 '경영난에 따른 기구 축소로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를 없애고 소속 사원 18명을 전원 해임한다'라는 공고문을 붙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기자들은 7시 총회에서 예정대로 권영자 차장을 분회장으로 선출하고 모든 사원들의 봉급을 삭감해서라도 해임된 18명 기자를 복직시키도록 회사에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새 집행부에서 실천특위 상임간사로 임명된 나는 다음 날 분회원들에게 돌리는 소식지 <알림>을 통해 '경비 절감을 위해 사원들을 집단 해직할 것이 아니라 전 사원의 임금을 인하함으로써 함께 나아가자'라고 회사에 건의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불법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다는 이유로 3월 10일 나와 박지동 기자를 해임했다. 나는 유인물 제작 책임자로 징계를 받았지만, 박 기자는 총회에서 기구 축소로 집단 해직을 주도한 이동욱 주필을 비난하는 불손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그동안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의 공식 회보로 제작해오던 <알림>을 갑자기 불법 유인물로 규정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10월 27일'의 조기, 권력은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3월 12일부터 시작된 농성에 참가했다가 17일 새벽 회사가 동원한 폭도들에 의해 3층 편집국에서 길바닥으로 끌려 나왔다. 농성 사원들은 이날 동아일보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한 다음 신문회관으로 옮겨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발족했다. 권영자 기협 분회장을 위원장으로, 안종필 차장을 기자협회 동아 분회장으로, 방송국 이규만 PD를 동아방송자유실행총회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나는 다시 유인물 <동아투위소식>의 제작 책임을 맡아,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우리의 주장과 활동 사항을 프린트하여 야당과 종교계, 법조계 등에 돌렸다. 항의 도열시위 6개월 후부터는 투위 소식지도 매월 17일에 발간했다.
내가 39살로 실직되었을 당시 첫째 딸이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1학년, 둘째 딸이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11월에 들어서자 주변의 지인이 영문번역 일거리를 갖다주었다. 내용이 좀 어려운 편이라 번역료는 200자 원고지 1매에 100원 남짓 되었다. 그 이후 심심찮게 번역 일이 들어와 이듬해 4월에는 외신부 이인철 차장 주도로 합동번역실을 열었다. 종각 건너편의 영풍문고 부근이라 ‘종각 번역실’로 통했다. 이 번역실에는 이인철 실장을 중심으로 나를 비롯해 동아투위 10명 가까이가 상근하다시피 했다. 우리는 당시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의 <죽음 앞에서>를 비롯하여 <말콤 엑스>, <뿌리>, <마치니 평전> 등 많은 책을 번역했다.
번역 일을 하면서도 매달 발간되는 <동아투위소식>은 나의 몫이었다. 번역 일 1년쯤 되던 1977년 봄 어느 날, 우리 동아투위를 담당했던 치안본부 정보 경위가 나를 찾아왔다. 근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겨 앉자마자 그는 볼펜과 백지 몇 장을 꺼내더니 ‘한민주’를 쓰라고 했다. 필적 감정을 확인한다면서 가로, 세로 등 열 번 이상 같은 것을 쓰게 했다. 후에 알고 보니 ‘한 민주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반정부 유인물이 서울 일원에 대량으로 살포되고 있어서 경찰은 그 제작자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가 동아투위 유인물 제작 책임자라서 나를 조사하기는 했지만 사실 당시 나는 원고만 썼을 뿐 필경과 프린트는 총무가 했다. 나는 동아일보에서 유인물 제작 유포죄로 목이 잘렸는데 결국 유인물 제작 사건으로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다.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이 되던 1978년 10월 나는 ‘동아투위 민주·민권일지’ 사건과 관련해서 동료위원 9명과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동아일보가 1975년 3월 독재 권력에 백기를 든 후 한국 언론은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권력의 소리만 확대하여 역사와 진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동아투위는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1년 동안 보도되지 않은 125건의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취합하여 <동아투위소식> 특집호를 제작해 배포했다. 10·24행사 이틀 뒤인 26일 경찰이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 안성열, 박종만을 연행해가자 나는 동아투위 위원장 대리가 되어 부당한 억압을 성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불법 유인물 배포와 유신헌법 철폐 주장 혐의로 10월 30일 연행되어 12월 4일 구속 기소되었으며 1978년 5월 9일 1심에서 징역과 자격정지 1월 6월을 선고받았다.
다음은 1979년 7월 25일 이 사건 항소심 법정에서 했던 최후진술 녹취록이다.
“본인은 신문기자다. 본인은 상식을 주장하다가 감옥에 왔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본인은 언론인으로서 자유언론을 주장하다가 황당하게도 감옥에 왔다. 언론인이 자유언론을 주장하는 것은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처럼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언론 상황은 그것이 아니다. 잠자코 박수만 치라고 하니 그게 될 말이냐?
강포한 자의 목소리만 크고 약한 자는 신음소리도 안 들린다. 감옥에 갇힌 펜과 마이크는 이 땅 언론의 현주소다. 어떤 자유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언론도 마찬가지다. 마치니의 고전적인 명제처럼 자유언론이라는 나무는 언론인의 피로써 길러지고, 펜과 마이크로 수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론자유가 상식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 나라가 독재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온몸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지하 시인의 시구(詩句)를 빌어 본인의 소회를 밝히겠다. 타는 목소리로, 타는 목소리로, 민주주의여 만세!”
- 장윤환, ‘동아투위 민주·민권일지’ 사건 최후진술 (1979.7.25)
감방 생활 1년이 가까워질 무렵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된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27일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권력 최상층부에 변고가 생긴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찾아와 곧 출옥할 것 같은 기대감에 들떠서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새벽 어둠이 걷히자마자 바깥을 내다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태극기가 반쯤 내려진 조기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집권 세력이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1979년 12월 10일 대통령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으로써 법적 근거가 사라졌기에 12월 27일 우리 동아투위 동지들은 면소 판결을 받았다.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하는 집회나 시위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 1, 2호와 함께 2013년 3월 헌법재판소 전원 일치로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역사적 판단을 30여 년 후에 받은 것이다.
일평생 자유언론을 향한 몸부림으로 살다
나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지 13년 만인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다시 언론 일선에 복귀했다. 나는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한겨레의 직선 편집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못다 한 자유언론의 열정을 불태웠다. 편집위원장 초기인 1989년 4월 20일에는 한겨레의 ‘방북 취재’ 사건과 관련 강제구인의 고초도 겪었으며 그 후 논설주간을 거쳐 2003년 정년퇴임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편소설을 쓸 정도의 끈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허장성세의 한국적 세태를 풍자한 희곡 <색시공>은 중앙대 김정옥 교수 연출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은퇴한 후 쓴 <여시아문>은 아직 무대에 오르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나는 팔순을 맞이하는 2018년 지난 삶을 반추해 보는 자서전 <글로 남은 한 평생>을 출간했다. 역사의 격랑 속에 자유언론을 향한 몸부림으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나의 이같은 신산한 삶이 의미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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