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도파민’ 중독된 MZ세대 잡는다...스포츠는 지금 시간 전쟁중 [올어바웃스포츠]

류영욱 기자(ryu.youngwook@mk.co.kr) 2024. 8. 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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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올림픽 테니스 남자 단식에서 만난 라파엘 나달과 노박 조코비치(오른쪽) <출처=AP>
1954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선 30년 전통의 ‘뉴포트 카지노 인비테이셔널’ 테니스 남자 단식 결승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결승에 진출한 두 선수는 매 세트 호각을 다퉜지만, 이를 지켜보는 관중들은 점점 조급해졌습니다. 관중들의 머릿 속은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도대체 이 경기는 언제 끝나는 거지”. 그 해 뉴포트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경기는 루 호드와 켄 로즈웰이 펼치는 복식 경기였지만, 도무지 단식 경기가 마무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테니스 경기는 세트 승리를 위해선 상대보다 2게임을 많이 따야 했습니다. 뉴포트 대회 단식 결승전은 결국 6-3, 9-7, 12-14, 6-8, 10-8로 총 5세트 83게임이 진행되고서야 끝이 났습니다. 지켜보던 관중들은 선수들만큼 진이 빠졌고 그만큼 복식 빅매치도 흥이 나질 않았지요.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가장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뉴포트의 볼셰비키’란 별명을 가진 토너먼트 디렉터 지미 반 앨런이었지요. “지긋지긋한 듀스 세트없이 경기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반 앨런은 이런 생각을 하며 훗날 ‘타이브레이크 룰’이라고 불린 새로운 테니스 규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지리한 듀스 공방은 그만...타이브레이크룰 만든 ‘뉴포트의 볼셰비키’
테니스 타이브레이크 룰 개발자인 지미 반 앨런 <출처=미국테니스협회>
반 앨런은 볼셰비키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굉장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표되는 테니스의 가장 큰 변화중 하나를 이끌어낸 것은 이런 성정이 작용한 것이지요. 그는 ‘반 알렌의 단순화 점수 시스템((Van Alen Streamlined Scoring System, VASSS)’을 고안해냈습니다. 초기 규칙은 매 세트마다 한 선수가 31점을 따내면 승리하게 되는 단순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치 포인트를 앞두고 30-30 동점 상황이 펼쳐지면 ‘추가 게임’을 여는 것입니다. 추가게임에선 한 선수라도 5점을 먼저 얻는 선수가 세트를 따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급진적인 시스템은 당시 테니스 세계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 앨런은 1965년 사비 1만 달러를 털어 프로선수 10명을 초청해 이같은 시스템의 대회를 열어보기도 했지만 선수들 반응도 역시 마뜩찮았습니다. 경기에 참여한 리차드 곤잘레스는 “다시는 이런 경기를 하지 않겠다”며 “25년간 이런 괴상한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패배한 적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VASSS는 외면받았지만 ’추가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는 4대 메이저대회중 하나인 US오픈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1970년 US오픈에서 처음으로 초기 타이브레이크 룰이 도입됐고, 개막일에 치러진 43경기중 26경기에서 최소 한 번 이상 타이브레이크 세트가 진행됐습니다. 선수들은 US오픈이란 대형 무대에서 이런 실험적인 규칙 개선이 이뤄진 것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9점중 5점을 선점하면 경기가 끝나는 추가 게임은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서 애쉬는 이 규칙을 ’가미카제 연습‘이라며 “이렇게 짧은 추가 게임으로 경기 결과가 좌우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US오픈 주최측은 굳건했습니다. 토너먼트 디렉터 윌리엄 탈버트는 “이것은 테니스의 중요한 진전”이라며 “카레이싱, 농구, 축구 등 기타 주요 스포츠처럼 테니스도 결승선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TV편성표 짜는데 도움안되는 ‘전통’과 ‘격식’....4대 메이저 대회도 결국 ‘스피드업’ 동참
11시간 5분동안 치러진 2010년 윔블던 테니스 남자 단식 1라운드 <출처=Gettyimages>
미국 테니스계가 타이브레이크 룰을 받아들인 배경엔 텔레비전 중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중계가 있기 전까지는 테니스 경기가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전세계 수백만명이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를 보면서 판이 바뀌었습니다. 미국테니스협회는 1969년 US오픈에 앞서 CBS와 5년간의 중계권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직전년 1회 US오픈 중계권료의 2배인 연간 10만달러에 달했습니다. 협회는 반 앨런의 도구를 사용하면 스케줄을 짜는데 용이하고 TV시청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처럼 스포츠가 관중들이 지켜보는 엔터테인먼트화가 진행되면서 ‘시간과의 싸움’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TV 등 실시간 중계가 가능한 미디어의 발달은 간소하고 규격화된 시간 제한을 강제하게 됐지요. 이같은 변화는 보통 신생 시장에서 먼저 시작되고 전통있는 시장이 이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테니스 역시 신대륙에서 1960년대 시작된 US오픈이 먼저 시작한 뒤 윔블던, 롤랑가로스(프랑스오픈) 등 구대륙 메이저 대회가 따라가게 된 것이죠. 윔블던과 롤랑가로스에선 최근까지도 마지막세트(5세트)는 2게임 이상을 앞서나가야 세트를 취할 수 있는 전통적 시스템을 취했습니다. 이러다보니 2010년 윔블던 남자 단식 1라운드에서는 3일에 걸쳐 11시간 5분동안 한경기가 치러진적도 있습니다. 이 경기는 3-2( 6-4, 3-6, 6-7, 7-6, 70-68)로 존 이스너가 결국 승리를 가져갔지만 타이브레이크 제도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키웠습니다. 결국 2022년부터 4대 메이저 대회 모두 마지막 세트까지 타이브레이크 제도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살기 바쁜데 이틀짜리 바둑이 있다?...생존 위한 MLB의 ‘피치클락’ 도입도
일본기원 기전 ‘혼인보전’의 이틀대국 첫째날, 마지막 수를 손을 써 봉해놓는 ‘봉수’장면 <출처=인본기원>
이같은 변화는 다른 스포츠에서도 발견됩니다. 멘탈스포츠의 대표격인 바둑이 대표적입니다. 최선의 한 수를 찾아가는 예술의 영역이었던 바둑은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러나 긴 경기시간과 낮지 않은 진입장벽으로 새로운 팬층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이때문에 한국을 비롯해 주요 국제대전에선 한 사람당 착수에 30분을 넘지 않은 속기바둑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바둑팬들이 즐겨하는 온라인 바둑 역시 속기바둑이 일반적이지요. 그러나 한중일중 일본만은 이같은 조류를 거부했습니다. 일본의 3대 기전은 몇 년전까지만 해도 결승 도전기 한 판의 제한시간이 한 사람당 8시간이나 됐습니다. 두 명 도합 16시간의 제한시간을 허용하다보니 경기는 하루에 끝나지 못해 ‘이틀걸이’로 두게 됐습니다. 첫째날 마지막 수를 바둑판에 올리지 않고 종이에 써 봉인하는 ‘봉수’도 이때문에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변화를 거부한 일본 바둑은 쇠퇴의 길로 빠져듭니다. 일본선수들은 제한시간이 3시간뿐인 주요 국제기전에서 힘을 쓰지 못했고, 바둑계는 한국과 중국의 2파전으로 나뉘게 돼죠. 결국 일본의 최대기전중 하나인 혼인보(본인방)전도 지난해 제한시간을 3시간으로 줄이는 변화를 택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구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야구 본가인 미국의 메이저리그(MLB)는 여전히 무승부 규정이 없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두 팀이 승부를 가릴때까지 경기를 치릅니다. 1984년 5월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밀워키 브루어스가 이틀동안 8시간 6분, 25이닝동안 경기를 한 일도 있었습니다. 반면 이제 막 40년을 넘은 상대적 ‘신생리그’인 한국프로야구(KBO)는 12회 말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 무승부로 처리됩니다. 텔레비전 보급과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에게 ‘무한정 경기’는 팬들의 흥미를 끌어들이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야구계에선 7이닝 야구, 승부치기 규칙(연장이닝에선 주자 1,2루를 채우고 이닝을 시작하는 것) 등 경기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전향적인 규칙들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잊을만하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MLB도 경기시간 단축을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년부터 ‘피치클락’을 도입하는 등 컴팩트하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만들기 위해 경주 중입니다. 주자가 없을시 투수는 15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한다는 피치클락이 자리잡은 지난해 MLB의 평균 경기 소요시간은 2시간 39분이었습니다. 직전년보다 25분 줄어든 수준이지요.

‘숏폼’ 익숙한 잠재적 팬층...Z세대 5명중 1명 “길어서 경기 안봐요”
다음 세대 스포츠팬의 중추가 될 Z세대<출처=Gettyimages>
스포츠업계가 이처럼 시간 단축에 매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더이상 팬들이 경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래 스포츠 팬의 주축이 될 Z세대는 더욱 참을성 없습니다. 유튜브 쇼츠, 틱톡 등 숏폼 플랫폼에 익숙하고 하루에도 수백번 디지털 디바이스를 껐다켰다하는 Z세대에게 느긋하게 소파위에 앉아 3시간 넘게 한 경기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2022년 모닝컨설트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응답자의 38%는 ‘좋아하는 스포츠팀이 없다’고 응답해 일반 성인(25%)보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중 57%는 ‘단순히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 반면 20%는 ‘경기 시간이 너무 길다’로 했습니다. 또 47%는 프로스포츠 경기를 생중계로 본적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즉 테니스, 야구, 바둑 등 주요 스포츠가 경기 시간을 줄이는데 목을 매는 것은 잠재적인 스포츠 팬을 확보하려는, 진화를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지요.

“전통 지키려다 팬들 떠난다”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버린 경기장위 진화
2024 파리올림픽 여자 57kg급 결승전을 치르고 있는 한국의 허미미(왼쪽)와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 <출처=연합뉴스>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kg급 결승전에서 우리나라의 허미미 선수는 석연찮은 패배를 당합니다. 허 선수의 아쉬운 패배 못지않게 결승전에 걸맞지 않은 지리한 공방도 논란이 됐습니다. 두 선수 모두 이렇다할 공격을 보이지 못했고 승부도 결국 ‘지도’를 누가 더 받았는지로 갈리게 됐지요. 호쾌한 업어치기와 화려한 연계기술로 사랑받았던 유도는 이제 얼마나 반칙을 하지 않는지가 승부의 키가 되버렸습니다. 일각에선 유도의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각종 기술을 금지하도록 규칙을 칼질한 국제유도연맹이 근본적인 원인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포츠도 진화가 필요합니다. 전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꾸준한 팬 유입을 위해선 ‘전통’보단 ‘변화’를 통해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허 선수를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한 크리스타 데구치 선수는 결승전 이후 판정에 대해 “더 나은 유도를 위해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바꿔야 한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유도는 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유도판 ‘타이브레이크 룰’로 매트 위의 진화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참고문헌과 외신> ◎https://www.usopen.org/en_US/news/articles/2020-09-02/us_open_round_1_by_the_numbers.html ◎https://www.tennis.com/news/articles/1970-the-tiebreaker-is-introduced ◎https://m.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29714 ◎https://www.mlb.com/news/longest-games-in-baseball-history-c275773542 ◎https://digitalcontentnext.org/blog/2023/01/16/sports-media-is-losing-gen-z-how-can-they-win-them-back/ ◎https://goknit.com/sports-has-a-gen-z-problem-leagues-continue-to-lose-the-next-generation-of-fans/ ◎https://www.greenfly.com/blog/why-short-form-digital-media-critical-sports-fan-engagement/

≪[올어바웃스포츠]는 경기 분석을 제외한 스포츠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스포츠가 건강증진을 위한 도구에서 누구나 즐기는 유흥으로 탈바꿈하게 된 역사와 경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문화, 수백억원의 몸값과 수천억원의 광고비가 만들어내는 산업에 자리잡은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알게 된다면, 당신이 보는 그 경기의 해상도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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