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의 서술만으로 채운 364쪽짜리 소설...'플롯 해체자' 배수아의 귀환
시공간 오가는 여러 겹의 이야기들
의미 아닌 촉수·감각 자체로 작용해
“여행의 시작에 우체부가 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가 배수아의 장편소설 ‘속삭임 우묵한 정원’.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생일에 찾아온 우체부는 두께가 있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넨다. 발신인인 ‘MJ’는 서울 돈암동에서 하숙을 쳤던 나의 집에서 10여 년 정도 함께 살았던 인물이다. “오랜 세월 아무런 연락 없이 살았고, 지금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가능성이 높은” MJ는 왜 하필 나의 생일에 편지를 보냈을까. 애초에 나에게 보낸 편지는 맞는 걸까. 여러 겹의 우연으로 잘못 배달된 우편물은 아닐까.
3년 만에 찾아온 배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자신을 ‘플롯 해체자’라고 표현하는 그의 소설답게 오롯이 편지를 받은 화자의 서술로만 364쪽의 책이 채워진다. 어떠한 규칙이나 조화 없이 한 사람의 사고로 여러 시공간과 이야기를 끊임없이 오가는 소설은 추리소설로도 읽히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거주한다는 의미의 집이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집”이 없어서 단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는 나와 MJ. 둘을 이루는 파편들의 속삭임 혹은 속삭임의 파편들은 “의외의 순간에 갑작스러운 물결로 내 안에서 일렁이기 시작함을 느끼”도록 이끈다.
화자부터 모든 것이 모호한 ‘감각들의 세계’
소설에서 “편지는 그 어떤 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이, 심지어 내 이름을 호명하는 단계조차 생략해 버린 채 곧장 어느 하루에 대한 기나긴 묘사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날은 바로 화자인 내가 태어난 날로, 편지는 석 장 반 정도 그날에 대해 묘사하다가 “그리고 그때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라는 불완전한 문장으로 갑자기 끝나버린다. 편지의 다음 장에는 수채화 물감과 펜으로 그린 한 여자의 초상화가 있다. 초상화의 얼굴이 자신이라고 확신하게 된 나는 충격에 빠진다.
MJ는 “내 생일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떠나버린 나를 이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황스러운 존재이기에 모종의 협박 편지일 가능성까지 고려된다. 화자는 MJ와 장기 하숙인이었던 음악 교사, 그에게 레슨을 받았던 학생들, 하숙집의 어린 식모, 배다른 자매 등 여러 사람의 기억과 회상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모호함의 영역에 머무른다. 일부 설정과 묘사는 동일하게, 혹은 조금씩 변주되어 반복된다. 배 작가의 소설에서 “독자가 경험하는 것은 현실의 서사적 내용이 아니라, 실재를 만들어내는 비정형적인 감각들의 세계"라고 평론 ‘시간은 기억보다 오래 살아남았다’에서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의 선취된 레퍼런스
모호함으로 가득 찬 책 ‘속삭임 우묵한 정원’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지난해 나온 배 작가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에 있다. 두 작품은 작가가 머무르는 독일 베를린 인근 시골 마을의 정원 딸린 오두막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함께 쓰였다. 배 작가는 이 산문집은 “’속삭임 우묵한 정원’의 산문 버전”이고, 소설은 “‘작별들 순간들’의 선취된 레퍼런스”라고 밝혔다. 산문집에는 이 소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여러 번 등장한다. 아주 멀고도 우묵한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속삭임으로 채워진, 어떤 장르로 분류하기 모호한 ‘속삭임 우묵한 정원’을 추리소설이라 분류한 것도 산문집에서의 배 작가다.
“언어는 의미도 의미 전달을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언어는 구축과 연속성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언어는 주관적인 촉수, 감각 그 자체였다. 살아서 퍼덕이는 물고기의 비늘이었다. 그것의 불연속적 광채였다.” 산문집에서 ‘속삭임 우묵한 정원’을 영영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 배 작가는 한없이 짧고 간헐적인 잠 속에서 읽은 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배 작가는 “그것을 내가 쓴 것이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썼지만, 이는 그의 소설에 대한 묘사다. 인과관계나 이해의 영역이 아닌 촉수이자 감각으로 작용하는 그의 언어는 비서사를 넘어 반서사에 닿는 이야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배수아라는 이름을 유효하게 하는 이유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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